빵호
[무한도전] 못친소 스페셜편에서 한 출연자가 사연을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지었다. 가슴 찡한 분위기 속에서 MC 유재석은 누군가를 보고 말했다. “아니 너는 왜 울어!”
카메라는 즉시 울고 있는 조세호에게 포커스를 맞추었다. 조세호는 말했다. ”저는 누가 울면 울어요 흑흑흑흑”
그 곳은 삽시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 날 나에게 그 전까지 잘 모르던 조세호라는 사람이 뇌리에 박히게 되었다. 그 후로 그가 TV에 보이면 응원하게 되었다. 그 날 울던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눈물샘의 장벽은 한없이 가볍고 낮다. 정과 의리, 열정에 매우 약한 나는 누군가가 그것을 공략해서 울어봐라!하고 작정한 신파같은 이야기에도 장벽이 어김없이 부서져서 눈물이 콸콸 흘러내린다. 그 누군가의 범위는 유형을 가리지 않는다. 넷플릭스 다큐에서 본 무리에서 소외된 호랑이, 유투브 숏폼에 등장하는 주인을 쫄쫄쫄 따라다니는 노견, 인간극장에 나오는 다정한 노부부, 꿈을 향해 자기 자신과 투쟁하는 학생, 하다못해 어느 노래 경연프로그램에서 가슴이 절절한 가사와, 그 배경이 되는 사연을 보고 울기까지 했었다.
일전에 [무쇠소녀단] 지옥같은 사이클훈련 편을 본 적이 있다. 출연진들은 수많은 오르막길과 굽이길을 오르는 동안 멈추고 달리고를 반복했다. 기어코 훈련을 끝낸 한 명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한 종목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대회까지 단 40여 일만이 남은 촉박한 기한 내에서, 체력을 쌓아서 철인3종 경기 완주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치밀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그를 울게 했다. 나는 바로 여기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의 마음에 십분 공감하기 때문이다. 프리다이빙 수심풀에서 목표수심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좌절했던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걱정과 불안이 그가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서 비롯됨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가여운 언니… 그렇지만 할 수 있어요! 꼭 이룰거예요!’ 생각하며 휴지뭉치를 들고 울었다. 때마침 들어오던 엄마는 그런 나를 보고 놀라서 물었다.
“너 우는거니???”
“아니 (킁) 슬프쟈나. 저 사람이 우는 게 슬프니까.”
한껏 코를 먹은 목소리로 대답하는 내게 엄마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녀는 수십년의 세월을 함께 보냈다. 내가 대문자 T의 제왕, 냉철한 이성의 화신이라 놀리는 엄마의 성격대로라면 분명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너는 참 눈물이 많은 아이구나.’
나는 전부터 종종 생각했다. 왜 누군가의 일에 대해 그렇게 눈물이 많은가?
생각해보면 내가 주로 눈물을 흘리는 때는 ‘우는 것’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때였다. 넷플릭스에서도, 유투브에서도, 인간극장에서도, 그 어떤 프로그램에서도 그 너머의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울어주는 것 뿐이었다. 내 집에 찾아온 친구가 가슴 아픈 연애를 눈물로 호소할 때도, 친구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그랬다.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친구에게 그저 눈물로 답해주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울게 했다. 말만 꺼내도 울음이 앞서 나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서 한 때는 쓸데없이 많은 내 눈물이 싫었다.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책임감이 없고, 그래서 가벼운 슬픔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오래 전에, 내가 울 때 함께 우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당시 나는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 후에 친한 언니들을 만나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왁자지껄 이야기하다가 그와 내가 자주 먹었던 떡볶이가 나와서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다른 이에게 아픔을 고백하는 것은 내게 익숙한 일이 아니었으므로 떨리는 목소리로 이별했음을 보고했다. 떠듬떠듬 말하는 나를 보던 언니들의 눈도 눅눅해졌다. 금세 나와 똑같이 젖은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반대로 내 슬픔이 가벼워지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모순적이고 극적인 일이었다. 사람과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찬란하고 신비한 교감의 효과를 목도한 기분이었다.
나는 불현듯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의 내 눈물이 정체가 없는 가벼운 것이라 생각했으나 과거의 어느 날 상대에게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심이 가득한, 그래서 무게가 두둑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제 나는 눈물이 많은 이유를 안다. 우리의 눈물에는 사랑이, 연민이, 공감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그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으므로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 고통받는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울어주는 것은 그 고통 속에서도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그 마음을, 우리는 멀리 있어도 이렇게 똑같은 측은지심을 가지고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는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앞으로도 내 울음은 너의 눈물을 가볍게 하기 위한 목적이자 수단이 될 것이다. 슬픔으로 슬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