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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보다 예민한 콩

매력

by 핸드스피크

“야, 커피는 맛으로 마시는 게 아니야. 향으로 즐기는 거야.”


미용실 한쪽, 커피포트에서 주르륵 떨어지는 커피. 달달한 헤이즐넛 향이 공감을 가득 채웠다.

그날, 스물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 한 모금 삼키자마자 얼굴이 찌푸러졌다.

향은 그렇게 좋았는데, 맛은 영 아니었다.

“이게 무슨 맛이에요? 도대체 왜 마시는 거예요?”

혀를 내두르는 내 모습을 본 원장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향은 좋은데, 맛은 없잖아? 대체 왜 마시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어른의 맛인가? 난 아직 멀었나 보다’싶어 그냥 넘어갔다. 카페에 가면 블루베리 쉐이크, 녹차라떼, 고구마라떼 같은 것만 골라 마셨다.

커피? 절대 아니었다. 쓴맛 따위 돈 주고 마실 일은 없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바리스타다.


바야흐로, 아직 커피의 매력을 몰랐던 스물 여섯. 나보다 네 살 많은 우리 언니는 커피를 참 좋아했다. 라떼 한 잔을 위해 일부러 카페를 찾아가는 모습이 신기했다. 커피가 그렇게 맛있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열정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제주에 있는 사촌언니를 만날 겸사겸사 우리 언니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언니, 제주에서 뭐 하고 싶어?”

주저 없이 돌아온 대답. “카페 투어!”


제주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별다른 계획 없이 언니를 따라 무작정 카페를 찾아다녔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달라지는 공기. 달달하고 고소한 향, 묵직하고 탄 향, 갓 볶아낸 원두의 깊은 내음까지. 카페마다 저마다의 향이 있었다. 어떤 곳은 에스프레소의 짙은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어떤 곳은 방금 구운 빵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여전히 과일 주스나 쉐이크를 골랐다. 하지만 언니가 마시는 커피가 궁금해 한 모금씩 맛보기 시작했다. 쓴맛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이상하게 다시 한 모금. 커피 맛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아메리카노와 핸드드립이 다르다는 것, 라떼는 단순한 커피 우유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다. 한 입, 또 한 입. 그렇게 커피는 아주 천천히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커피와 음료만 마셔서 배가 액체로 가득 찬 덕분에, 이동하면서 화장실을 몇 번 다녀와도 방광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웃긴 추억을 남긴 채 서울로 돌아온 후, 일요일. 평소처럼 예배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는데, 언니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여기 근처에 진-짜 맛있는 라떼가 있는데, 네가 분명 좋아할 거야! 한번 마셔봐!”


언니는 살짝 들뜬 듯 경쾌한 걸음으로 카페를 향했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얼마나 맛있길래’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시큰둥하게 따라갈 뿐이었다.


이름은 ‘깔바’ 깔루아 원액이 들어간 라떼라고 하니 술을 좋아하는 나는 번쩍 뜨였다. 깔루아는 커피 맛이 나는 달콤한 술이었다. ‘근데 라떼에 술?’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맛이었다. 하지만 궁금해서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처음으로 커피에 반해버렸다. 그동안 마셔본 라떼 중에 진짜 전문 바리스타가 만들어주는 라떼는 처음이었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우유 거품과 깔루아의 원액이 어우러져, 달콤한 맛까지 더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마치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커피 한 잔에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아질 수가 있다니. 따뜻한 라떼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내려가자, 마음까지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 카페는 내 단골집이 되었다. 맛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곳의 특별한 에너지가 좋았다. 찾아가면 직원들은 큰소리로 반겨주었고, 유쾌한 아메리칸 스타일의 인사로 주먹인사와 포옹을 건넸다. 알고보니 그들은 뮤지컬 배우였고, 그래서 발성이 또렷하고 넘치는 에너지로 공간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는 다양한 커피를 시도하며 새로운 맛을 탐험하는 즐거움까지 알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나도 직접 커피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한 잔을 건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우연히 청음회관에서 농인의 일자리 양성을 위한 바리스타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바로 신청했다.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회였다.


압구정역 피자헛에서 알바를 병행하면서, 바리스타 교육 프로그램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이론부터 실습까지 6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나도 그 카페처럼 유쾌하고 활기찬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열정이 솟아올랐다. 맛있는 커피 한 잔을 건네며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설렘이 가득했다.


다행히 나는 세상에 내놓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섬세한 미각을 가졌다. 어릴 때부터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재료가 무엇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처음에는 그 맛의 깊이를 잘 모르던 내가, 이제는 한 모금에서 느껴지는 신맛, 쓴맛,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고소한 풍미까지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원두마다 그 차이를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 같은 원두로 추출량을 몇 그램씩 달리하면서 여러번 맛을 음미했다.


레몬이나 딸기 같은 상큼한 향, 플로럴한 꽃향, 고소한 땅콩과 견과류 향, 그리고 깊고 진한 초콜릿 향. 원두의 온도 변화와 시간 차이에 따라 맛과 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기록하며, 그 차이를 하나하나 고민하고 치열하게 공부했다. 산미를 더 살리기 위해서는 몇 그램씩 추출해야 하는지, 원두 가루의 굵기는 얼마나 미세해야 하는지, 바디감이란 끝맛에서 여운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그런 모든 것을 고려하며 한 잔 한 잔을 음미했다.


원두는 여자보다 예민하다. 날씨와 물의 온도에 따라 맛이 수십 번 달라지고, 어제와 똑같은 그램과 온도로 내려도 오늘의 맛은 완전 달라진다. 그런 예민한 원두를 이해하려면,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에스프레소부터 핸드드립, 우유 스팀, 로스팅까지 폭넓게 공부하며 매일 연습을 이어가던 중, 바리스타 대회에 한 번 나가보라는 추천을 받았다. 아직 나에게 그런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거절했지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선생님의 강력한 권유에 마지못해 신청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매일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몇 잔씩 마시며 연습했고, 과다 섭취로 인해 속이 쓰리고 아팠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전부 게워냈다. 우유 스팀도 조건이 까다롭다. 적정한 온도는 55~65도. 그 이상으로 되면 커피만의 향이 사라지며 텁텁해지고, 그 이하로 맞추면 미지근해서 애매하니 맛이 없어진다. 거품도 마찬가지다. 크거나 거칠어지면 라떼 아트도 망가지고, 맥주 거품처럼 거품의 맛만 나고, 커피 본연의 맛을 가리게 된다. 실크처럼 매끄럽고 부드럽게 만들어야 우유의 단맛과 커피만의 깊은 맛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적정한 온도를 익숙하기 위해 우유를 몇 팩씩 사가며 수없이 연습했다. 카푸치노는 쓴 맛인 에스프레소와 부드러운 우유가 만나야 하며, 라떼와는 다르게 거품이 조금 더 많이 들어가야 했다.


매일 바리스타 교육과 대회 연습, 그리고 알바까지 쪼개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문득 ‘고작 6개월밖에 못 배웠는데 나는 이 대회에 나갈 자격이 있을까?’라는 부담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선택하고, 그 열정으로 여기까지 온 과정이 재미있고 감사했다. 어떤 결과가 나와든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을 거라 믿었다. 하루가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코엑스에서 열리는 서울커피엑스포에 참여할 만큼 열정이 뜨거웠다. 다양한 커피를 음미한 탓에 저녁 알바에 갔을 때는 심장이 뛰고 손이 떨리는 부작용까지 겪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바리스타 대회 날. 선배들과 함께 참여하는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떨리는 걸 보니, 나 역시 정말 잘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내가 아직 그들을 따라가기엔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었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제비뽑기 결과, 나는 맨 마지막 주자로 나가게 되었다.


바리스타 대회의 룰은 이랬다.


1 자기 소개를 한다.

2 에스프레소를 3잔씩 추출한 후, 쟁반을 담아 심사위원 앞에 가져다준다.

3 카푸치노를 만들기 위해 에스프레소를 3잔씩 다시 내리면서 동시에 우유 스티밍을 한다.

4 완성된 카푸치노를 심사위원 앞에 서빙하며, 맛을 설명한다.

5 마지막으로 작업대를 깨끗이 정리하며 마무리한다.


이 모든 과정은 10분 이내에 끝내야 했고, 청결도는 점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회 마지막 순서라는 부담감이 컸다. 긴 대기 끝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순간 미칠 듯이 떨렸지만, ‘안돼도 괜찮으니 후회 없이 즐기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타이머가 시작됐다. 댄서이자 배우로서 무대 체질이었던 나는 긴장할 틈도 없이 자연스럽게 대회라는 무대에 녹아들었다. 선곡해 둔 음악이 흐르자 리듬을 타듯 손이 움직였고, 어느새 나는 커피를 즐기며 내리고 있었다. 센스 있게 여자 심사위원께 먼저 커피를 내어드린 뒤, 곧바로 카푸치노를 만들었다. 부드럽게 올라간 우유 거품 위로 하트를 그려 넣고, 쟁반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멘트를 덧붙였다. “제가 만든 카푸치노는 달고나 같은 맛이 납니다.”


심사위원들의 반응을 살피며 마지막까지 집중했다. 모든 과정이 눈 깜빡할 사이에 끝나버렸다.

너무 재미있었다. 이제 진짜 다 내려놓고 결과를 기다렸다. 2위를 발표하는 순간, 대표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혜진이었다. 대표님의 장난에 분위기는 유쾌하게 바뀌었고, 나는 조용히 떨어질 뻔한 심장을 부여잡았다. ‘역시 나는 아니었지’.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우승자가 호명되는 순간, 또 내 이름이 불렸다. 아까처럼 또 장난일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지만, 이번에는 진짜였다. 믿기지 않는 상태로 무대에 올랐고, 내 이름이 또렷이 적힌 상을 받아 들었다. 설마, 내가 수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우승할 거란 상상은 단 1%도 하지 않았는데…


쓴맛에 얼굴을 찌푸리던 내가, 커피 맛을 몰라 혀를 내두르던 내가,

어느 순간 커피를 사랑하게 되어 커피를 공부하고, 속이 쓰리고 아파 토하기도 하며 치열하게 연구해 온 끝에 우승의 자리까지 올라왔다는 사실이 정말 내 꿈에 한 발 더 가까워진 것 같아 벅찼다. 그리고 반드시 멋진 바리스타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피 한 잔으로 위로를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그 후 나는 바리스타가 되었고, 일하면서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위로를 주겠다고 정성껏 내린 커피 한 잔. 그 한 잔이, 결국 나를 더 위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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