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몰라.”
고흐 전시회를 다녀오면서 남편과 나눈 이야기 중 제일 기억에 남았던 말이다. 나와 남편은 고흐 원화가 12년 만에 한국으로 온다는 소식에 가슴이 설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는 만큼, 전시회를 보기 전 고흐와 관련된 내용을 미리 공부하려고 했다. 정신적 쇠약으로 인해 결국 자신의 귀까지 자른 고흐의 일화는 너무 유명했지만, 얼룩진 그의 유년 시절은 미처 몰랐었다. 고흐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고흐는 참 비운했던 화가라는 결론으로 늘 귀결된다. 살아생전 그가 그린 그림은 단 한 점만 팔렸으며,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모두 외면받으며 불행한 삶을 살다 단명한 화가, 고흐.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가슴 한 켠이 아려왔다. 그가 안쓰럽게 다가왔다.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그림을 보기 위해 시간을 내서 왔다. 고흐가 이런 모습을 봤다면 정말 기뻐했을 텐데.
조금은 무거운 마음과 기대를 안고 전시회에 들어서자 네덜란드 시기의 그림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가 처음 마주한 그림이기도 했지만, 유독 <여인의 두상> 그림에 오래 머물렀다. 너무나도 어두워서 자세히 들여다봐야 보이는 그의 주름, 어쩐지 슬퍼 보이는 소를 닮은 눈, 여인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인 두건을 쓴 모습,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지만, 기어이 밝은 물감을 덧칠해 빛이 꿋꿋하게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고흐는 평소 자신이 존경하던 밀레처럼 당시 돈이 되지 않는 노동자의 모습을 계속해서 그렸다. 자신이 원했던 그림을 그린 것이다. 네덜란드 시기를 지나 파리, 아를 시기의 그림을 보고 드디어 생레미 시기의 그림을 관람했다. 가장 아프고 우울했던 시기에 그렸다던 그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고 환하게 빛났다. 그림만 본다면 그 누구도 그에게 그런 고충이 있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어쩐지 더 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도 그의 고통을 몰라준 것만 같아서. 남편은 슬픔에 빠진 나를 보며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사실 모두가 고흐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하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런데 내가 본 영상에서 한 도슨트가 한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어. 그 시대에 물감이 비싼 유화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대. 고흐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동생 태오 덕분에 고흐는 그림을 계속해서 그릴 수 있었어.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정말 큰 힘이 되지 않았을까? 고흐는 살아생전에 인기를 끌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것 같아. 고흐는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그렸으니 너무 불행하게 살았다고만 볼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 어쩌면 그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몰라.”
남편의 말을 들으며 문득 장흥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장흥에 사시던 할머니는 엄마가 고등학생이던 시절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결국 엄마는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할머니 간호에 전념했다.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늘 애달파했다. 그랬기에 당신의 딸이 낳은 나를 더욱더 아꼈다. 할머니는 살아오는 내내 아프시다가 청량한 여름의 어느 초입에 평소와 똑같이 잠드시고는 다시 깨어나지 못하셨다. 상을 치르고 할머니 집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려다 울음이 터졌다. 샤워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샴푸와 바디워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쭈그려 앉아 대야로 물을 뿌리면서 왜 할머니는 샤워기가 없는 상태로 지낸 것인지, 유통기한이 지난 목욕 용품을 왜 계속 쓰는 건지 속상했다. 더 이상 할머니가 없는 대청마루에 앉아 반복되는 일상 속 그의 낙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했다. 무뚝뚝한 할아버지 곁에서 하루에 한 두마디도 안 했을텐데. 4명의 자식이 모두 서울로 가 자주 만나지 못했을 텐데. 고명딸인 엄마는 청각장애가 있어 전화통화가 어려웠을 텐데. 문득 할머니가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치자 그가 가여웠다. 이것이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다 다시 전시회에서 본 <여인의 두상>이 떠올랐다. 가만히 할머니를 투영해 보았다. 한껏 주름진 얼굴, 그러나 인자한 미소를 띠는 입술, 늘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봐주던 할머니의 강인한 눈. 할머니 얼굴로 가만히 비추는 햇살까지. 나는 어쩌면 내 기준대로 할머니를 그저 가여운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할머니는 옛날 방식을 고수하는 분이었다. 그랬기에 외삼촌들이 샤워기를 설치해주려고 해도 분명 만류했을 것이다. 대야로 쓰는 것이 편하다고 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같이 살자는 자식들의 권유에도 할머니는 단칼에 거절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서울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이 더 좋다고 하면서. 비록 엄마와 통화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엄마와 연락을 하기 위해 문자를 치는 방법도 배운 신세대 할머니였다. 고흐도 할머니도 그들의 삶이 어땠을지 우리는 절대 모르지만,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풍진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