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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마음

넴릿

by 핸드스피크

여느 날처럼 일하고 있는데 남편 준이에게 연락이 왔다. “이따 저녁에 외식하자”라는 내용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의아했다. 하지만 기분이 내심 좋았다. 평소 같았으면 피곤함을 핑계로 곧장 집에 갔을 사람이었으니까. 준이는 동네에 있는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예상치 못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담이가 케이크를 들고 있었고, 성이는 그 순간을 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생일이니까 영상 남겨야지!” 웃으며 내게 핸드폰을 들이댔다. 성이는 순간을 담는 걸 좋아해서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시간을 나누곤 했다.


담이와의 인연은 고등학생 시절 제과제빵 동아리에서 시작됐다. 빵 굽는 냄새 사이로 나눈 인연이 벌써 십 년이 넘게 이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담이의 연인인 성이와도 자연스레 친해졌고, 우리 네 사람의 조합은 이제 내 생일의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생일은 해마다 찾아오지만, 매년 누군가가 그것을 기억해 준다는 건 전혀 당연하지 않다.


올해도 담이와 성이는 어김없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줬다. 심지어 한 시간 거리인 우리 동네까지 찾아와준 거였다. 그 따뜻하고 익숙한 얼굴들을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준이는 그런 나를 보고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담이가 주먹보다 작은 케이크를 건네줬다. 내가 바다를 좋아하고 물속에 유영하는 걸 즐긴다는 걸 기억한 그는 물개 모양으로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왜 이렇게 작냐고 묻자 웃으며 말했다. “언니 올해 케이크 많이 받았잖아. 다 못 먹고 냉동해 둔 거 알아서 일부러 한입 크기로 만든 거야!” 그리고 자기가 운영하는 빵집에서 소금빵, 휘낭시에 같은 걸 몇 개 챙겨와 내 손에 쥐여줬다. “집 가서 하나씩 먹어.” 그렇게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웃고, 그간 나누지 못했던 안부를 주고받았다.


계산하려고 카운터에 갔을 때 사장님이 말했다. "계산은 이미 옆 테이블 손님이 하고 가셨어요." 순간 해 ‘누구지?’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옆에 있던 준이와 담이, 성이도 나처럼 당황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장님은 그저 웃으며 “아까 저기 앉아 계시던 분이요.”라고 짧게 덧붙였다.


누군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침 성이가 찍은 영상이 생각났다. 영상 속에 그 사람이 잠깐 잡혀 있었고,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낯선 얼굴이었다. 부동산 일을 하는 준이 부모님은 동네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냈다. 그중 한 명인가 싶었지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돌아보면 식사 내내 내 코를 찌르던 담배 냄새가 신경 쓰였다. 예의가 없다고 생각했고, 눈썹을 찌푸리며 식사했지만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냄새의 주인이 우리가 먹은 밥을 계산하고 갔다니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겉모습과 작은 단면만 보고 누군가를 판단한 건 아닌가 싶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을 단단히 닫고 있었구나. 문득 머쓱해졌다.


혹시 우릴 아는 사람일까? 그도 내 생일을 함께 축하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우리가 수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마음이 들었던 걸까? 그게 동정이었든, 단순한 호의였든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그냥 ‘밥 한 끼쯤은 내가 내줄 수 있다’는 넉넉한 마음이었을까.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모두 잠시 따뜻해졌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더니, 그날 이름 모를 사람은 밥 한 끼로 마음을 전했다. 담이와 성이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표현했다. 성이는 사진을 찍으며 순간을 오롯이 나누는 친구이고, 담이는 직접 만든 케이크와 빵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친구였다. 특히 작고 세심한 케이크에서 담이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게 바로 담이와 성이의 언어였다. 어쩌면 그 사람에게 있어 마음을 전하는 방식은 밥값을 대신 내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나는 문득 내 마음이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내 마음을 전하고 있을까? 여전히 주저하고 있진 않을까?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계산을 대신하지 않아도, 내가 가진 언어로 누군가의 일상에 작은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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