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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인이다

귤귤

by 핸드스피크

나는 농인이다. 처음 보는 사이에 자기소개를 하며 농인이라고 말하면 다들 한 번에 알아듣는 법이 없다. 상대방의 표정에 물음표가 뜨면 다시 한번 청각장애가 있다고 덧붙여야 한다. 설명은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 나는 입 모양을 봐야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전화 통화는 어렵다고. 그렇다고 너무 크게 말하거나 천천히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나는 돌 즈음에 원인불명으로 청각장애 판정을 받으면서 모든 가족을 울게 했다. 나와 또래였던 사촌과 같이 있을 때,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에 사촌은 반응했지만, 내가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 발단이 됐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엄마는 당신의 탓이라며 가슴을 두드리며 엉엉 울었고, 아빠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안았다. 할아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다. 할머니 또한 쉴새없이 훌쩍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 슬픔을 거두고,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끊임없이 내게 말해주었다.


당시 1층에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삼촌 2명이 살았고, 2층에는 우리 가족이 살았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넷째작은아빠는 매주 책을 빌려와 책을 읽게 하며 공부를 가르쳐줬고, 나와 20살 차이가 났던 막내작은아빠는 일명 물고기 뽀뽀를 수시로 퍼부어대고, 나를 데리고 다니며 요즘 유행하는 아디다스 가방과 컨버스 신발 등을 사줬다. 이렇게 모두의 걱정과 사랑이 나를 자라게 했다. 모두가 내게 슬픔을 전염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내가 농인이라는 사실이 슬프지 않았다.


이렇게 가족의 따뜻한 품 안에서만 지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인생은 결국 녹록지 않은 법이다. 만일 그때 내가 청인이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기억에 남는 사건을 시간의 흐름대로 나열해 보겠다.


모든 것이 크게 보이던 꼬꼬마 시절에 엄마와 함께 어린이대공원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화장실에 급해 엄마에게 스스로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고 싶은 자유의지가 강했던 나는 화장실에 같이 들어가자는 엄마를 마다했다. 그렇게 당차게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서 걸쇠를 잘 잠그고, 소변을 잘 보고 물도 잘 내렸다. 이제 문을 열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걸쇠가 단단히 박혀버린 것이다. 나는 갇힌 줄 알고 문을 두드리며 엉엉 크게 울었다. 밖에서는 정체불명의 소리와 문이 거세게 움직였다. 무슨 소리인 줄 모르겠기에 더 공포스러웠고,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이 움직이니 내가 크게 잘못한 것만 같았다. 이 문이 열리면 나쁜 사람이 나를 잡아갈까 봐 무서웠던 나는 목청이 터져라 울었다. 겨우 문이 열리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엄마가 허겁지겁 나를 안고 한참이나 놔주지 않았다. 그 표정이 아직도 마음에 깊이 박혀있다. 만일 내가 청인이었다면 밖에서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알아듣고 구조 아닌 구조를 가만히 앉아서 잘 기다렸을 텐데. 그랬으면 엄마가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됐을 텐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감기가 오래가서 결국 축농증이 생긴 적이 있었다. 그날은 유독 차디찬 바람이 부는 건조한 겨울이었다. 아침부터 두 개의 콧구멍이 막혀 숨쉬기가 힘들었다. 눈이 간지럽고 미지근한 두통이 나를 괴롭혔지만, 선생님의 입 모양을 집중하며 수업을 들었다. 그런데 반 친구들이 자꾸만 내가 앉아 있는 창가를 바라봤다. 나도 덩달아 같이 창가 쪽을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이상했지만 수업 중이니 일단 넘어갔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때 내가 코로 피리를 불고 있었던 모양이다. 막혀있는 비강 사이로 숨이 힘들게 빠져나가면서 소음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친구들과 함께 애꿎은 창가를 바라봤으니 어쩐지 비참했다. 만일 내가 청인이었다면 애초에 피리 소리가 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그 후로 나는 코가 막히는 날이면 정말 온 힘을 다해 조용히 숨을 쉬려고 노력한다. 다시는 피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나는 내가 차 문을 세게 닫는 줄 몰랐다. 다른 사람의 차를 탈 기회가 많이 없었을뿐더러 내가 차문을 닫는 것에 대해 부모님은 크게 뭐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차문을 부서져라 닫는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는 난감하게도 대학교 교수님의 차를 얻어 탔을 때였다. 친구와 함께 교수님을 정문에서 만나서 면담을 마치고, 교수님이 기숙사까지 태워주신다길래 감사한 마음에 얻어 타며 평소와 같이 차문을 닫았다.


쾅-!


친구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문을 너무 세게 닫았다고 말해줬다. 그때 흘린 식은땀이 아직도 내 등에 흐르고 있다. 만일 내가 청인이었다면 내가 크게 닫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조심히 닫을 수 있었을 텐데. 그 일을 계기로 차 문을 조심히 닫고 있다. 어찌나 조심히 닫았는지, 끝까지 닫히지 않아 ‘문 열림 경보음’이 뜬 적이 많았다.


가창 시험은 또 어떤가. 나는 내가 음치인 줄 정말 몰랐다. 가창 시간에 반 아이들이 내 노랫소리를 들으며 비웃은 것이 깊은 트라우마가 되었다. 사실은 비웃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가 부르는 노래가 음이 맞지 않으니 웃은 것일수도 있는데. 그 때 이후로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노래를 들려준 적이 없다. 다행히 이 트라우마는 나중에 남편이 없애줬다. 내가 어떤 노래를 부르든 너무 귀엽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물론 참 노래를 못하기는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남편 덕에 내가 음치여도 괜찮다고 생각을 그때부터 하기 시작했다.


청인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던 크고 작은 순간은 있었지만,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남들과 다르게 특별하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농인인 덕분에 수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농사회라는 곳에 발을 들일 수 있어서 좋았다. 입 모양을 꼭 봐야 하므로 바쁜 현대 사회에서도 한번 더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수어를 쓰며 자연스레 표정이 다양해진 것도 좋았다. 조용히 해야 하는 도서관이나 지하철 같은 곳에서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옷을 사러 갈 때도 사장님 앞에서도 옷이 마음에 든다, 별로다 같은 이야기를 눈치보지 않고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내가 농인이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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