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
나는 어려서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태생적으로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밝은 아이였다. 그래서 나랑 친구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수업이 지루해지면 갑자기 나 혼자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선생님! 우리 게임하면 안 돼요?”
정말 천진난만했고, 웃는 게 제일 좋았다. 교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 했고, 아이들도 선생님도 모두 웃는 그 순간이 참 좋았다.
때로는 애들 앞에서 혼자 가수 흉내를 내며 춤을 추고 끼를 부리기도 했다.
운동도 잘해서 체육 시간만 되면 나는 항상 달리기 대표 주자로 나가곤 했고, 춤도 많이 추었다. 학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장난과 웃음 덕분에, 아이들과 선생님 모두 함께 웃는 순간이 많았다. 그 분위기가 참 좋았다. 늘 밝게 지내던 나를 보고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부잣집 딸 같아.”
“정말 귀하게 자란 티가 나.”
“어떻게 그렇게 항상 밝아?”
말도 일부러 예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진심으로 꺼냈을 뿐인데, 그런 나의 진심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매 순간 진심이었고, 자연스레 말도 예쁘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이 변해가는 게 느껴졌다.
점심시간이면 늘 손을 잡고 같이 가자고 하던 친구가, 체육 시간마다 항상 나부터 찾고 같이 다니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날 찾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어렸던 나는 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고,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 상처에 대해 솔직하게 대화하는 법을 몰랐다.
내가 뭘 잘 못했는지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감정이 처음이라 표현할 용기도 방법도 없었다. 그저 사람이 너무 좋았기에, 나를 지키기보다는 맞춰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늘 진심이었고, 언제나 상대를 위한 마음뿐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나는 늘 이해하려 했고, 거절엔 서툴렀다. 상대를 위한 일이 곧 나를 위한 일이라고 믿었다.
성인이 되어도 변함없었다. 사람을 좋아했고, 늘 진심이었으며, 무엇보다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나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거절이 익숙하지 않다 보니,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늘 어려웠다. 괜히 기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좋게 무마하려 애썼고, 그게 반복되면서 습관이 됐다. 싫은데 좋은 척하고, 아닌 걸 알면서도 괜히 웃어넘기고. 그렇게 진심이 아닌 말들이, 결국엔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일이 있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그중 한 친구는 늘 자기 동네에서만 놀자고 했다. 그 동네는 우리가 사는 곳과 꽤 멀었고,번번이 그 친구에게 맞추는 게 은근히 부담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 친구만 빼고 나머지 친구들과 만난 적 있었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친구는 내게 서운함을 털어놓았다.
“왜 나만 안 불렀어?”
사실 속마음은,
‘같이 놀고 싶었지. 근데 넌 항상 너만 생각하니까…’ 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 바쁜 것 같길래, 못 불렀어 ㅠㅠ”
그 순간에도,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애매하게 돌려 말하고 말았다. 배려하는 척하며 그저 평화롭게 넘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는 오히려 화를 내며 말했다.
“물어보기라도 했어?”
결국 “미안해” 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마음속 진짜 이유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원하지 않은 일도 쉽게 거절하지 못해, 억지로 응한 적이 많았다. 그렇게 내 중심은 조금씩 무너졌고, 마음은 점점 방황했다. 불편한 감정을 괜히 상대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내 생각을 또렷하게 말할 용기가 없었고, 나를 지키는 방법도 몰랐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게, 결국 나를 더 힘들게 하고 있다는 걸 늦게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내 삶을 가장 크게 흔든 관계 하나가 떠올랐다. 그 많은 관계들 중에서도, 유독 나를 지치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마음이 힘들다며 내게 고민을 털어놓던 친구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친구는 점점 더 내게 기대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엔 걱정됐고,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옆에 있어주려 애썼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었다. 내 감정도 있었고 쉴 시간도 필요했다. 일정이 있는데 가지 말라며 붙잡는 친구를 볼 때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미안함, 짜증, 걱정이 뒤섞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 친구는 예전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혹시 또 그런 일이 반복되지는 않을까, 그게 두려웠다. 나도 이미 지쳐 있었지만, 그 친구가 무너질까 봐 끝까지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점점 고갈되어 갔다. 나 자신을 돌볼 여유도 없이, 자꾸만 그 친구의 감정에 휩쓸렸다. 그 친구는 자기 감정에만 몰두한 채, 내가 얼마나 무너지고 있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결국 나는 후회하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잘해주지 말 걸. 그렇게 내 진짜 마음을 자꾸만 눌러두다 보니, 결국 내 시간만 허무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남을 위하려던 선택이, 결국 나를 가장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착한 내가 너무 싫었다. 지쳐 있는 내 모습을 더는 외면하고 싶지 않아서, 처음으로, 날카롭게, 강하게 말해봤다. 떨렸지만, 더는 침묵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관계는 생각보다 쉽게 끊어졌다. 그렇게 애썼던 시간들이, 이렇게 간단히 끝나버리니까 더 허무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다 잘해줄 필요는 없다는 걸.
나는 왜, 그렇게까지 거절을 못했던 걸까.
왜, 거짓말까지 해가며 나를 점점 더 외로운 사람으로 만들었던 걸까.
사실 나는 거짓말을 가장 싫어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 역시 ‘괜찮은 척’을 하며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상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불편해질까봐, 싸우기 싫어서.
그러다 보니 본능처럼 돌려 말하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내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는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 습관이었는지를 처음으로 처절하게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였다.
진심으로 좋아했던 사람,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주고 싶었던 사람.
그런데도 나는 또다시 괜찮은 척 돌려 말하고 있었다.
갈등이 생겨도, 속상해도, 늘 상대를 먼저 생각했다. ‘이해해주다 보면, 언젠가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하는 믿음으로.
상대가 싫어할까 봐, 신경 쓰이게 하기 싫어서.
절대 나쁜 의도는 아니었지만, 말을 돌리다 보니 결국 거짓말을 하게 된 적도 있었다.
사실대로 말했다 해도 결국엔 싸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랬더라면 조금 더 정직하고, 건강한 방향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을텐데. 나는 그저, 버림받을까봐 두려웠고, 그래서 끝내 솔직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행동했느냐보다, 왜 거짓말을 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내 진심을 알아봐주길 바랐다. 나도 속상했다. 거짓말을 하려던 마음은 정말 단 1도 없었는데, 왜 결국 그렇게 돼버린 걸까.
그 질문들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돌아봤다. 그러다 문득 알게 됐다. 이 모든 건, 내가 지금껏 살아온 방식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갈등 앞에서는 늘 피했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말보다 눈치를 먼저 봤고, 마음을 내보이기보다는 아무 일 없는 척 넘겼다. 돌아보면, 그 모든 선택의 밑바닥엔 버림받을까봐 두려운 내가 있었다.
결국 진심이 아닌 말들이 쌓여, 실망시키는 일이 반복됐다. 억울한 상황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먼저 솔직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계속 살다 보면, 언젠가는 신뢰마저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그제야 나는, ‘말하는 방식’에도 책임이 있다는 걸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건강한 관계를 위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진심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사람. 말하는 방식에도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길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건강한 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