넴릿
점심시간이 끝났다. 양치질 후 입안에 남은 상쾌한 향을 느끼며 나는 업무에 집중하려고 책상에 앉았다. 그때 핸드폰의 까만 액정이 깜빡이며 켜졌다. 화면에는 [엄마 암 검사 결과]라는 알림이 크게 떠 있었다. 일주일 전에 엄마가 병원에서 자궁암 검사를 받는다는 걸 알았다. 그때 내가 설정해 둔 알람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나는 이 알람이 없었다면 완전히 잊고 있었을 것이다. 손끝으로 화면을 터치해 카카오톡을 열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병원 다녀오셨어요?
엄마의 답장은 금세 도착했다.
—무슨 병원일까? 오전엔 옷 교체 작업했고 지금은 불광천 걷다가 이마트까지 와 버렸네 ㅎㅎ
핸드폰을 쥐고 답장을 기다리던 나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일주일 뒤 결과 나온다고요.
잠시 후 화면에서 엄마의 메시지가 두 번 연달아 떴다.
—아~ 문자로 왔어… 괜찮대!
—우리 딸 최고 ㅎㅎ
자궁암 검사 결과가 정상이라니 다행이었다. 엄마의 “괜찮대!” 메시지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채팅창에 사진 두 장이 올라왔다. 첫 번째 사진은 투명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샐러드랩 파티팩이었고, 두 번째 사진은 콘샐러드, 고구마범벅, 감자범벅, 단호박범벅, 푸실리샐러드가 알록달록 담긴 파티용 5종 샐러드였다.
—원하면 이거 사서 지하철에서 전달할까 했는데.
사진 속에서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퇴근 시간에 맞춰 나에게 음식을 건네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신혼집으로 독립한 지 반년이 지났지만, 엄마는 여전히 나와 남편 준이의 식량을 걱정했다.
‘아잇… 엄마도 참.’
약 한 달 반 전, 수영을 시작한 엄마가 물 위에 둥둥 뜨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던 날이 떠올랐다.
토요일 아침에 따뜻한 이불 속 포근함을 뒤로 하고 나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본가 근처 수영장 물속은 차갑게 피부를 감쌌고, 엄마와 나는 물살을 가르며 팔과 다리를 반복적으로 움직였다. 몸을 다 풀었겠다 싶어 배영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물 위에 누워보는 연습을 시작했다. 물을 무서워하는 엄마는 누워보려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한 손은 내 어깨를 꽉 잡고, 다른 한 손은 수영장 레인을 놓지 못했다. 엄마의 손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귀엽고 웃겨서 나는 엄마의 등을 철썩철썩 치며 큭큭댔다. “나 좀 믿어봐요.” 뿜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고 내 얇은 두 팔로 엄마를 조심스럽게 지탱하며 연습했다. 손끝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우리는 물속에서 웃픔이 교차하는 순간들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본가에 갔다. 엄마는 자신을 받쳐주느라 지친 나를 위해 또띠아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려 했다. 그런데 적채를 썰던 엄마가 그만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그날 이후 엄마는 손을 다쳐 당분간 요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레 반찬을 가져다주는 일도 사라졌다. 하지만 나를 챙기려는 엄마의 마음만큼은 여전했다.
—파티용이 뭐야. 양이 너무 많아서 안 돼.
음식물 쓰레기가 될 걸 생각하니 아찔해서 나는 바로 거절했다.
잠시 후 화면이 깜박이며 켜졌다. 마트에서 찍은 반찬 사진들이 채팅창에 속사포 쏘듯이 올라왔다. 오징어채조림, 검은콩조림, 멸치조림, 된장고추, 무말랭이, 미역줄기볶음, 도라지볶음, 고사리볶음, 절임양념깻잎, 뉴트로사라다, 겉절이김치, 봄동무침, 봄나물무침, 부추김치, 통더덕무침, 오이소박이, 가리비무침, 꼬막비빔장, 도라지무침… 스무 가지가 넘었다.
‘아잇… 엄마, 이거 다 사주려고?’
기가 찬 마음을 꿀꺽 삼켰다. 사진 한 장씩 확대하며 유심히 봤다. 내가 고심 끝에 고른 반찬은 오징어채조림과 부추김치였다. 퇴근 후 갈치구이와 김치비빔국수에 오징어채조림을 곁들이면 맛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 날 차돌박이에 곁들일 생각으로 부추김치도 골랐다.
—내일 차돌박이 구워 부추김치랑 같이 먹어야지.
—내일 외식인데.
—오잉? 내일 무슨 날이죠?
—우리랑 횟집에서 저녁 먹기로.
아뿔싸, 양가 부모님과 식사하는 날을 깜박했다. 부추김치는 빨리 먹어야 하는지라 뺐고, 통더덕무침은 두고 먹어도 된다는 엄마의 권유로 결정을 바꿨다. 반찬을 다 고르고 나서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고 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던 메시지 알림이 또 울려 화면이 켜졌다. 이번에는 연어회 사진이었다.
—마지막 ㅋㅋ 연어 어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답장을 보냈다.
—연어는 언제까지 먹어야 해요?
—오늘 비빔 국수랑 먹어야지.
갈치구이와 함께 먹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의 답장을 보고 나는 이마를 짚었다. 느낌표 버튼을 연타로 눌러 답장을 보냈다.
—갈치가 있다고요!!!!!!
느낌표에 담긴 내 감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엄마는 다시 연어회를 권했다.
—11조각이네.
연어회가 열한 조각이든 상관없었다. 엄마의 넘치는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어쩐지 못말리겠다. 반찬 두 개만 있으면 된다고 단호하게 못박았다.
퇴근 시간이 되자 나는 지하철에 올랐다. 그리고 마트를 다녀온 엄마도 내가 탄 열차가 오는 시간을 맞춰 올라탔다. 엄마의 실루엣을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에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엄마가 활짝 웃으며 장바구니를 들고 내게 다가왔다.
본가는 두 정거장 뒤에 있고, 신혼집은 거기서 세 정거장을 더 가야 한다. 열차 안에서 엄마와 나는 빠르게 많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두 정거장을 지나 본가가 있는 역에서 내릴 줄 알았던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내 신혼집이 있는 역까지 다다르자 함께 내렸다. 다시 반대편 열차를 타기 위해 엄마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나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타러 간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개찰구에 나섰다.
집에 도착하자 핸드폰 화면에 엄마의 메시지가 떴다.
—반보기라고 알아?
—옛날에 딸 시집 보내고, 딸 보고 싶어도 사돈댁까지 맘대로 못 가니 딸이랑 중간에 만나서 얘기하다 돌아오는 일이 있었대. 나 오늘 반보기한 느낌이다 ㅎㅎ
—근데 돌아오는 길은 지옥철이네.
엄마의 메시지를 차마 누르진 못하고 미리보기로 계속 들여다보았다. 코끝은 시큰해지고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그만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잇… 엄마도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