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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영혼의 친구

매력

by 핸드스피크

안부를 매일 묻지 않아도, 마음이 닿는 순간이 있다.

길고 긴 하루를 버티고 있던 어느 날, 불쑥 도착한 하늘 사진 한 장과 톡.


[하늘이 너무 예뻐서 너 생각났어.]


그저 하늘 사진 하나, 짧은 말 한 마디였는데, 내 안에 반가움과 고마움이 잔잔히 일렁였다.

누군가는 여전히 하늘을 좋아하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가을만 되면 왜 니 생각이 더 나는지 몰라 하늘이 맑아서 그런가 내 친구해줘서 고마워 혜지니.]


톡 하나에 담긴 마음이 마음을 건드렸다. 별다를 것 없는 일상 속에서, 그런 다정한 안부가 깊은 위로가 되었다.


그 친구와의 인연은 2020년 1월, 코로나가 세상에 퍼지기 직전의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쁜 일정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따뜻한 나라, 보라카이로 여행을 떠났다. 푸른 바다와 높고 투명한 하늘 아래,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둑해진 저녁, 한 술집에 들어가 고삐를 풀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음악에 몸을 맡기며, 웃음소리로 가득한 우리만의 공간에서 시간은 잠시 멈춘 듯 했다. 그때,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뽀얀 피부에 다홍빛이 도는 도톰한 입술과 초롱초롱한 눈빛, 하늘색 나시에 하얀 바지를 입고 상큼한 분위기를 풍기며, 쑥스러운 듯 휴대폰을 꺼내 우리에게 내밀었다.

메모장 화면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한국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이시죠? 너무 재밌게 놀고 계시는데 같이 놀고 싶어요!! 괜찮으시면 같이 놀래요?]


우리가 수어로 대화하고 있었기에, 멀찍이서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 것이었다. 그의 눈엔 존중이 담겨 있었고, 괜히 방해될까봐 한 걸음 뒤에 망설이다 용기 내어 다가온 듯한 태도였다. 입모양이 잘 보이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고, 수어는 몰라도 우리와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전해지는, 그런 다정한 매너였다. 우리는 흔쾌히 그들을 맞았고,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함께 어울렸다.


“한국에선 어디 살아?” “언제 돌아가?”

짧은 대화 끝에, 자연스럽게 번호를 주고 받았다. 동이 트는 전, 또 보자며 웃으며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다시 만났다. 전날보다 훨씬 더 편하게, 더 많이 웃고, 춤추고, 더 오래 이야기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또 보자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말뿐이 아니었다.

서울에서 몇 번. 부산에서도 한 번. 짧지만 진심을 나눈 만남이 이어졌다.


그 친구와는 말이 없어도 마음이 닿는 순간이 많았다. 조용한 교감은 자연스럽게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로 이어졌다. 보라카이에서 시작된 인연이, 이렇게 오래도록 따뜻하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인연이란 게 이렇게 스며드는 것이구나 싶었다.

어느 날, 수어 기초반에 등록 했다며 다음에 만나면 수어로 이야기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 마음이 참 다정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상하게 자꾸 가까이 느껴지는 사람. 고맙고, 참 따뜻한.


시간이 흘렀고, 각자의 삶이 바빠지며 연락은 점점 뜸해졌지만 안부를 묻지 않아도 마음이 닿는 순간들은 계속 됐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멀리서 찾아와 응원해주었고, 오지 못하는 날엔 배우들과 스태프 모두 드시라며 과일과 초콜릿을 통 크게 보내오기도 했다. 마치 커피 차처럼, 멀리서도 전해오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생일이면 어김없이 선물이 도착했고, 맑은 하늘이 뜬 날엔 짧은 톡 한 줄이 날아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자주 연락은 안하지만 항상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너가 있다는거~~ 혜진이 너 존재만으로도 고마오!] 이런 메시지와 함께 애정을 듬뿍 담은 이모티콘까지 보내오는, 정말 고마운 친구.


[홀로 책임지고 살아보는 멋진 제주살이였어요.

다양한 인연들로 꽉 채워진.


사람들이 혜진씨를 좋아하는 이유는

집중해서

잘 바라보고

잘 들어주는

진실됨을 보아서일거야.


누가 뭐라 평가하든

본질은 바뀌지 않으니

사랑속에

혜진으로 단단히 서고

즐겁게 춤추길.]


제주에서 만난 영혼의 친구가 내게 보내온 메시지.

그 친구를 만나기 전, 나는 사람들에게 치이고, 지쳐 있었다. 좋아하던 일을 해도 행복하지 않았고, 바쁜 일정 속에서 점점 망가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좋아하던 제주로 무작정 떠났다. 월정리 바다를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고, 모래 위에 누워 태닝을 하며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 졌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제주라는 섬에 빠져들었다.


결국 나는 그 섬으로 날아가 홀로 삶을 시작했다. 낯선 땅에서 생계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조금씩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나 같은 농인을 처음 만났다는 그 친구들은 어느 날 조심스레 말했다.


“수어, 직접 가르쳐주면 안될까?”


그 말에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 마음의 상처때문에 수어가 싫었다. 제주가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수어를 쓸 일이 없다는 거였다. 그런데 친구들은 수어를 꼭 배우고 싶어했다. 나는 수어 자격증도 없고, 가르쳐본 적도 없었기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친구들은 계속해서 물어왔다.


“진짜 수어 가르쳐줄 생각 없어?”

“언제 가르쳐줄 수 있어?”


수어는 분명히 정당한 언어다. 마치 영어도 원어민에게 배우는 게 더 도움이 되듯, 수어도 내가 직접 가르치는 게 더 낫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그런데 친구들은 괜찮다고, 수업료도 받으라며, 생계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고 따뜻하고 푸근한 말들이 내게 용기를 줬다.


그래서 적은 수업료로 다섯 명까지만 접수를 받기로 했고, 수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수업에서, ‘영혼의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 친구는 제주 살이를 하는 동안,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필요한 건 없는지, 혼자 사는 집에서 뭘 해 먹는지 늘 걱정해줬다. 가끔 반찬도 나눠 주기도 했고, 한 달에 한 번쯤은 제주 구경을 시켜주며 맛집 소개해줬다. 아플 땐 채소와 과일을 한가득 챙겨, 집 앞까지 찾아와 주기도 했다.


제주살이 222일째 되던 날,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날 아침, 친구는 내 집 앞에 작은 선물과 짧은 쪽지를 두고 갔다. 그리고 카톡으로 한 통의 메시지도 남겨주었다.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우리는 참 깊은 인연이었구나.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애정이 꾹꾹 눌러 담겨 있는 게 느껴졌다. 그 덕분에 마음이 몽글해졌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만나는 동안에도 그 친구가 얼마나 다정한 말들을 자주 건넸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봐주었는지,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인연이 고맙고 또 감사하다.


[혜진~ 연습이 한창이겠다!


오늘 손님중에 혜진과 웃는 인상이 너무 닮은 사람을 보았어.

너무 기분이 따뜻하고 안심되고 좋은거야.


혜진의 미소는 축복받았구나… 생각했지!

보고싶어지고. 편안해지고 푸근한. 다정한.


보고싶은 혜진. 힘내며 연습해요!]


국립극장 <맥베스> 연습중이던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그 친구도 역시 자주 안부를 묻지 않아도, 어느 날 문득 생각나 보낸다는 그 짧은 안부 하나가 내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른다. 제주에서 우연히 맺은 인연이,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마음 깊이 축복이라고 느낀다.


오늘도 나는 그 친구들의 다정한 안부로, 다시 하루를 춤추듯 살아간다.

그 다정한 말들이, 이토록 나를 지켜준다. 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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