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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판 Oct 21. 2024

가난의 흔적

아버지는 학교를 일찍 관두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지냈다. 그러다 스무 살이 되어서 독립을 하기 위해 내륙으로 올라왔다. 올라와서 용접을 배운 뒤 그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아버지는 외향적이고, 생각이 많다. 수모를 참지 못하고, 나이가 들수록 더 그랬다.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성미에 맞지 않아 금방 일을 관두고는 했다. 대신 다른 사람들과 팀을 이뤄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했다.


한국이 성장하는 동안 건물을 지을 일도 많았다. 길을 가다 자신이 일했던 건물이 있으면 그곳을 가리키며 은근 자랑을 했다. 벌이도 좋았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돈을 모으지는 못했다. 건설 현장은 하청이 여러 번에 걸쳐 있어 중간에 임금을 착복하거나 체불하는 일이 많았다. 이게 옛일이라 할 수 있지만 근래에도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 아버지는 상대에게 돈을 받아내려고 하면 나중에 일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미루는 경우가 많았다. 일이 항상 고정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기에 수입이 들쑥날쑥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났을 때 자기가 모 대기업에서 일한다고 했다. 당시 그 기업의 하청 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을 속인 것이다. 어찌 됐든 둘은 결혼을 해서 두 아들을 낳았다. 이때쯤 일하다가 알게 된 어느 중견기업의 사장이 아버지를 마음에 들어하여 일감을 계속 줄 테니 사업장을 차리라고 제안했고, 그 제안을 받아 공장을 열었다. 그렇지만 사장이 건강 악화로 갑자기 쓰러지면서 약속은 무산됐다. 아버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꼬박꼬박 임대료를 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보냈다.


그러는 동안 남은 가족은 안양에서 지냈다. 안양은 외가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지내던 곳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셋방살이를 했고, 어머니는 인근 공장에서 일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를 보러 이따금 양주에 올라가고는 했다. 평상시에 보지 않던 아버지를 보는 일은 낯설었다. 그저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다는 인식만 있었다. 아버지는 거의 허물어질 듯한 작은 원룸에서 지내고 있었기에 사무실로 쓰는 컨테이너에서 가족들을 재웠다. 재개발로 인해 살던 집을 옮겨야 할 때 아버지와 집을 합쳤다.


이사를 온 집은 어느 산 중턱에 있는 판넬로 된 집이었다. 집은 넓었지만 불이 났던 흔적이 있어 이용할 수 없는 공간도 많았고, 어떤 방은 집주인이 치우지 않은 잡동사니가 쌓여 있어 입구가 거의 막혀 있었다. 그래도 집값이 저렴해서 선택한 곳이었다. 위치는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오가는 길은 흙길이었고, 옆에는 <나는 자연인이다>에 출연할 법한 아저씨가 한 명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부모님은 많이 다퉜다. 주로 아버지의 음주와 그로 인한 어머니의 바가지로 인한 것이었다. 그때는 누가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보면 아버지도 가부장적이어서 살림은 무조건 어머니가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도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술자리를 다니며 멋대로 돈을 탕진하고, 분란을 일으켜서 어머니가 싫어할 만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둘은 서로 악다구니를 쓰거나, 가끔 물건을 던지고 부수면서 싸웠다.


부모님이 싸울 때면 세상이 무너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에 하나 둘이 싸워서 일이 잘못되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렇지만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컸다. 대신 스피커가 강했던 어머니의 말을 따라 아버지처럼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는 의미 없는 다짐을 하고는 했다.


내가 대학을 진학할 때 가족은 사촌 형이 운영하는 화성의 공장 기숙사로 들어갔다. 원래 계획은 아버지가 사촌 형에게 일을 배워서 직원으로 일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나이 어린 조카에게 배우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고,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 아버지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사촌 형도 어찌어찌 우리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상황이 마뜩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다시 건설 현장 일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그 집에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공장의 주방에서 직원들의 식사를 만들었다. 어머니의 요리 솜씨는 특별하거나 모자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요리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런데 혼자서 매일매일 십여 명의 식사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공장에서 인근에 있는 식당과 계약을 하면서 어머니도 식당 일을 관두고, 공장에서 일했다.


형은 가난을 의식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활로를 찾았다. 그렇게 하여 공고와 공대를 졸업하고, 전공을 살려 대기업에 취직했다. 나에게 있어 어린 시절의 형은 별로 좋은 존재는 아니었다. 부모님이 일을 하기 위해 밖에 나가면, 집에는 나와 형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형은 자신의 권력을 내세웠다. 밥을 먹을 때 매번 라면을 끓여다주기도 하고, 컴퓨터도 자신이 하고 싶을 때 독점했다. 서로 많이 다투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관계가 많이 좋아졌다. 형이 없었더라면 가족이 버티지 못했을 것이므로 고맙다.


나는 경제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책과 공상을 좋아했고, 그것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나와 내 주변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고민했다. 그렇기에 지금의 내 모습도 어쩌면 과거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내향적인 성격으로 인해 도전을 좋아하지 않았고,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지만 가족은 그것을 지원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싶어도 돈에 가로막혔다. 어른이 되어서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야 했지만 돈벌이를 안 했으니 대부분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럴 때면 몇 평 남짓 되지 않는 공장 기숙사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컴퓨터 게임에 몰입했다. 공장 지대라 마땅한 일자리도 없으므로 친척 형이 일하는 공장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뭐라도 좀 해보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쳤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상태에서 계속해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십 대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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