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비 지원 교육을 마치고 나서 한동안 쉬었다. 여전히 부모님과 형은 취직을 하라고 성화였다. 겉으로는 수긍했지만, 게임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주위에서 주는 압력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무업으로 3개월 정도를 보내다가, 구직 어플을 통해 일자리를 찾았다. 형이 취업준비생들이 모인 카페도 알려줬지만, 그곳에서 말하는 스펙이나 자격증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나는 글을 쓸 사람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또 스스로 취업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일자리를 알아보니 독립할 필요를 느꼈다. 버스정류장까지 내려가는 데에만 15분이 걸리고, 버스를 타고 어디를 가기에도 멀었다. 독립을 해야 뭐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독립해야 할지 막막했다. 대신 먼저 돈을 모으자고 생각했다. 돈을 모으면 독립을 하거나, 글을 쓰면서 집에서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그렇지만 당장 어디에서 일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내향적인 탓에 사람과 얽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사무직으로 한정됐다. 그렇지만 어떤 일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래서 전공을 살려 할 수 있는 업종을 찾아봤다. 작가라는 키워드로 구직 어플을 검색하면 바이럴마케팅 회사가 검색되고는 했다. 바이럴마케팅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회사는 대부분 서울이나 먼 지방에 있었다. 그러다가 지역에 있는 바이럴마케팅 회사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보았고, 위치를 확인해 보니 비교적 가까웠다. 그래서 그곳에 지원해서 들어가게 됐다.
회사에서 하는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업체에게 대가를 받고 블로그 글을 발행하는 것이다. 노하우라고 할 것은 없었다. 당시 네이버에서는 글의 질과 관계없이 일정한 양의 사진과 글만 있으면 블로그 상단에 노출되어서 일반 블로거의 글이 묻히기 쉬웠다. 사용자는 원하는 정보를 찾기 어려워서 불편했지만, 업체의 홍보로는 적합해서 많은 바이럴마케팅 회사가 블로그로 몰려들었다. 실상 비대면으로 하는 전단지 아르바이트였다.
대표는 이쪽 분야에서 일하다가 독립한 사람이었다. 작은 회사라 다른 회사에 비해서는 경쟁력이 약했기 때문에 그저 몇몇 업체와 제휴를 맺고 그들을 관리해 주었다. 인터넷을 어려워하는 자영업자에게는 할 만한 광고로 보였기 때문에 의외로 충성 고객이 많았다.
지금은 알고리즘이 달라졌지만, 그때는 광고를 하기 위해서 블로그 점수를 올려 최적화를 해야 했다. 그 후 최적화가 된 계정에 광고글을 올린다. 이 두 가지 활동을 직원에게 나누었는데, 내가 처음에 한 일은 최적화였다.
블로그를 최적화시키기 위한 공식적인 방법도 나중에 알려졌다. 당시에는 단지 상위에 검색되는 블로그 포스팅을 보고 추측할 뿐이다. 이 시기에 공유되었던 내용은 중복되지 않은 사진 몇 장을 넣고 아무 글이나 쓰는 것이다. 글의 내용은 사진의 내용과 맞으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이다. 지금은 인공지능 기술이 향상되어서 이렇게 하면 안 되지만 당시에는 그게 가능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글의 내용이 중복되면 안 된다. 내용이 중복되면 어뷰징으로 본다. 그래서 해외 블로그의 사진을 퍼와서 가져오고, 글은 직접 썼다.
글을 쓰는 일이니 어떤 면에서는 창작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추구하는 방향은 창작이 아니었다. 오로지 최적화된 아이디를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당 보통 20~25개의 아이디를 관리한다. 각 아이디마다 매일 꾸준히 1~2개씩 글을 올리고, 이웃을 팔로우하고, 소통을 하면서 조회수를 유지 시켜야 한다. 그러니 글은 분량만 채우면 되는 부차적인 것이다. 처음에는 손에 익지 않아서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럭저럭 할 만해졌다. 그래도 쉬지 않고 일해야 퇴근 시간과 맞아떨어질 정도로 바빴다.
사무직이기는 했지만 공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매번 반복되는 업무였고, 사람들과 딱히 친해질 시간이 없었다. 모두가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자기 일을 할 뿐이었다. 사무실은 PC방과 비슷한 구조였고, 사장님도 같은 공간에서 일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보이스피싱을 하는 곳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일은 적응해서 그런대로 할 만했고, 최저임금이지만 돈도 꾸준히 나왔다. 아쉬운 것은 사대보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지만 이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장님은 직원들에게 적당히 친절을 베풀었지만, 직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당장은 교통이 문제였다. 회사가 생각보다 후미진 곳에 있었다. 근처에 대학교가 있어서 대학교로 가는 교통편을 이용하면 갈 수는 있었다. 문제는 집에서 바로 가는 교통편이 없었다. 자차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버스로 두 번이나 갈아타서 가야 했다. 그렇게 하면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가장 큰 문제는 회사에 비전이 없어 딱히 이곳을 계속 다닐 만한 동기가 없었다. 그래도 사장님은 나를 신뢰해서 광고글을 올리는 역할로 돌렸다. 중년 여성 연예인이 광고모델로 활동하는 무명 화장품 브랜드를 포스팅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건이 터졌다. 네이버의 알고리즘이 바뀜과 동시에 그동안 활동하던 광고 블로그가 제재됐다. 이로 인해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는 블로그를 운영하기가 어려워졌고, 회사도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다 보니 회사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사장님도 소문을 파악해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잘 수습되지 않았다. 평소에 활달하게 일하던 직원도 상황이 좋지 않자 관두겠다고 했다. 나 역시도 여기서 얼마간 일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오래 일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갑작스레 돌아가신 외삼촌의 장례식을 다녀오고 나서였다. 나중에 그것을 두고 농땡이를 피웠다고 한소리를 했다. 그나마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예민한 시기여서 그랬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장과 같이 일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쯤 다시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일상은 늘 반복됐고, 그것을 더 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마침 그때 읽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도 그러한 생각을 더 부추겼다. 주인공이 모래가 많은 마을에 강제로 갇힌 뒤 그곳 생활에 순응하게 되는 이야기인데, 이대로 있다가는 주인공처럼 영원히 이 회사에 매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진저리가 났다.
한편으로 외삼촌의 죽음도 계기가 되었다. 외삼촌은 인테리어를 하는 분이었는데, 욜로를 추구해서 자식에게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사람이었다. 외삼촌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내가 회사에 다닌다고 하니 “너도 꿈을 포기했구나.”라고 말했다. 외삼촌도 예전에 작가가 되고 싶어 했다. 작가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를 동경했던 것은 분명했다. 근황을 듣고 아쉬워하던 모습이 역력했다. 그 후 갑작스레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것이 외삼촌의 유언이 되었다. 물론 다시 글을 쓴다고 해도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책을 안 읽은 지도 오래되었고, 한동안 글에서 손을 떼었기 때문에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