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간의 고립 기간 동안 사회와의 연결을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다. 친구를 만날 수 있으면 만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고향에 있어서 거리가 멀어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우연히 이웃 블로그에서 수원에서 독서모임을 한다는 소식을 보고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모임은 모임 어플에 있는 독서모임이었다. 어플로 만나는 모임은 취미를 목적으로 하지만 만남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소개팅 어플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취미를 빙자한 단체 소개팅에 가깝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래도 내가 간 독서모임은 주요 회원들이 취미를 중시하는 쪽이어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활동했다.
처음 독서모임에 갔을 때는 초대 운영자가 떠나고 새로운 운영자가 운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모임 시간은 일요일 저녁으로 모임이 끝나면 곧장 흩어지기 일쑤였다. 아무리 독서가 중점이라지만 사람들 간의 접점이 없는 것이 어색했다. 그 후로 모임 시간이 바뀌고, 운영자도 한 번 바뀌면서 고정 회원이 생기고, 안정적으로 운영이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
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을 모임에서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실제로 몇몇 사람은 문학을 즐겨 읽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 이름을 들으면 아는 작가를 즐겨 읽는 정도고,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아서 그런 면은 나와 맞지 않았다. 책을 좋아해서 독서모임에 온 사람들도 책의 내용이 지나치게 슬프거나 난해하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 경우에는 그런 책을 더 선호했다. 자기계발서를 들고 온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사회학 서적으로 답했다.
그럼에도 모임에 계속 나간 이유는 오히려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책을 좋아해서 모인 사람들이어서 모이는 사람이 대부분 좋은 사람이었다. 가끔 고전문학이나 인문학 서적을 읽고 토론을 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자리가 좋았다. 어떤 경우 내가 읽고 이해한 내용을 말하면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기도 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사는 것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 극명하게 엇갈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일부 사람들은 『멋진 신세계』를 읽고 존처럼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오히려 톱니바퀴 같은 삶이 좋다고 긍정했는데 모임에서는 그 의견이 다수 의견이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모임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 삼십 대 이상에,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독서를 좋아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여행이나 스포츠 등 다양한 취미를 즐기고, 독서 역시 그러한 취미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처음에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다소 거부감이 들었지만, 나중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 경우에는 책이 전부이고, 책을 통해 세상이 나아지리라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을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태도가 흥미로웠고, 반대로 사람들은 나를 흥미로워했다.
3년 동안 활동하다가 사람들과 친해지고 나서는 모임이 끝날 때마다 뒤풀이에 참여했다. 성인 이후로 사람들과 그렇게 즐겁게 어울리는 경험이 처음이었다. 친구가 있기는 했지만 몇몇 긴밀하게 연락하는 친구를 제외하면 비즈니스 관계처럼 느껴졌다. 가까운 관계여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같은 학창시절을 공유한 동창이어서 의무적으로 만난다는 느낌이었다. 반면에 독서모임은 매주 열려 꾸준히 나가면 같은 사람을 달에 한 번 이상은 보게 된다. 그렇게 만나는 횟수가 친구를 만나는 횟수보다 더 많았다.
모임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것을 다 풀어내려면 책 한 권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지난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에게는 즐거웠던 추억이지만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저 독서모임은 내가 사회와 유일하게 연결되었던 끈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작가지망생이라고 소개했고, 거기에 대해서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친해지고 나서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넌지시 묻고는 했다.
모임에서 연애나 비즈니스를 할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의 지위나 신분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모임장이었던 누나는 내가 독서모임에 자주 나오기도 하고, 아는 책이 많아 모임 진행에 도움을 주기도 해서 그런 부분을 인정해 주기도 했다. 나 역시 독서모임에 오면서 얻은 것이 크다. 나는 사회적으로 미숙했고, 고립 생활이 길어지면서 점점 더 미숙해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독서모임에 나와 사람들을 만난 것이 사회로 나와서 활동할 때 도움이 됐다. 만일 독서모임도 나가지 않고 고립 생활이 이어졌다면 사람에 대한 공포감이 더 컸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사람을 만나는 게 익숙하다는 건 아니다. 사람을 만나면 낯가림이 심한 편이고, 오래 만나야 신뢰하는 편이다. 그래서 익숙한 사람이 있는 안정적인 자리에 있어야 다른 사람을 대하기가 편하다. 고립하는 동안에는 내 상태가 불안하기도 해서 사람들을 대하기가 더 어려웠다. 독서모임에서 사람들과 좀 친해지고 나서는 낯선 사람도 더 편하게 대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훈련을 한 것이다.
고립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과의 연결이다. 독서모임의 경우 책을 읽고 와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는다. 내가 책을 좋아하기 때문에 책을 선택한 것뿐이지, 다른 취미가 있다면 그 취미로 사람들과 연결되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모임을 하다 보면 인간관계 때문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다. 거기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모임마다 성격이 다르므로 어떤 곳에 가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다른 모임을 찾으면 된다. 처음 간 독서모임이 마음에 들어 오랫동안 다녔으니 내 경우에는 운이 좋았다. 운이 없다면 여러 번 시도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사람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는 못했다. 독서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게 꼭 물질적인 부유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취미로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책만 읽고 사느라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힘들었다. 사람을 만나기 위해 모임에 왔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편견 때문에 마음의 벽이 있기도 했다.
특히 독서모임을 다닐 무렵부터는 친구들과 거의 교류를 하지 않았다. 이때쯤 친구들도 일이나 공부로 바쁠 시기여서 최소한의 교류만 했다. 가끔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전화를 하는 쪽은 친구들이었다. 연락이 싫다거나 귀찮은 것은 아니었지만 방 안에 있는 동안에는 무기력하고, 멍했다. 그런 상태에 있다 보면 다른 것보다 게임을 하는 것이 훨씬 재밌었다. 게임을 하면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편했다.
연락하는 친구 둘을 제외하고는 일주일에 한 번 모임에서 사람을 만났다. 고립 상태에 있었지만 그것을 깨려고 나름 노력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괴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것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하고도 교류하기 어려웠다.
이따금 근황을 묻는 지인들의 연락에도 답장 주기가 길어졌다. 카카오톡으로 개인 연락을 하는 경우도 거으 없었다. 나중에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을 한 번에 지운 적이 있는데, 극단적으로 지우기는 했지만 다섯 명만 남은 적도 있다. 관계를 맺기 위한 최소한의 연락도 어려웠고, 또 어떻게 관계를 이어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연락을 하고 싶어도 나를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