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과 종종 여행을 가기는 하지만 장기 여행은 하지 못 했다. 한 달 살기가 유행이라는데 그렇게 여행을 갔다가는 생활비가 거덜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연애 초부터 입버릇처럼 한 달 살기를 하자고 이야기하고는 했다. 우리만큼 시간 여유가 있는 커플이 얼마 없다. 나 역시 송지현 소설가의 『동해 생활』을 읽고 국내 한 달 살기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 후 어쩌다 국내 지역에서 한 달 살기를 지원해 준다는 소식을 듣고 정보를 계속 찾아봤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정보를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지원사업이 잘 열리지 않는가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요새는 네이버보다 인스타그램에 홍보를 많이 하는 편이고, 관련 정보를 찾다 보면 알고리즘에 떠서 정보를 찾기가 수월하다. 그것을 몰랐던 당시의 나는 어쩌다 통영에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한다는 소식을 봤다. 마침 일이 끝나는 시기에 하는 사업이라 신청했는데 덜컥 됐다.
그때는 기획에 관해서 잘 몰랐지만 어쨌든 특별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MZ세대 프리랜서 커플의 통영 카페 투어 워케이션’이라는 주제를 잡았다. 2주간 통영의 숙소 세 군데를 잡은 뒤, 숙소 근처 카페를 돌아다니며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렇게 해서 통영에 갔는데 생각보다도 더 조용한 동네였다. 관광지로 활성화하기 위해 루지나 케이블카가 있기는 하지만 평일에는 한산했다. 관광을 목적으로 통영을 돌아본다면 하루면 충분했다. 그렇지만 일주일 이상 머무르니 지역에 애정을 느꼈다.
초반 여행은 삐걱거렸다. 하루에 한 개의 카페를 가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기획서상에는 매일 카페를 간다고 계획했다. 그래도 2주에 2~3일 정도는 쉬거나 자유 일정을 넣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지원사업이다 보니 매일 SNS 인증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카페를 돌아다니면서 매일 방문 인증을 했다. 이 정도 되니 여행이 아니라 일처럼 억지로 끌려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낯선 지역에 머무르는 것은 그런대로의 재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아예 낯설었던 곳도 며칠을 머무르니 위치를 대략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대부분 도보와 버스를 이용했는데, 통영은 교통편도 잘 되어 있어 섬을 가는 것이 아니라면 이동이 편했다. 그래서 매일 애인과 같이 새로운 카페를 찾아다니며 통영을 돌아다녔다.
원래 있던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역에 머무르는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했다. 그 점이 아직도 인상에 남는다. 애인은 많이 돌아다닌 경험이 있어서인지 크게 감흥을 받지는 못한 듯했다. 애인은 카페를 중요시하는데 대부분의 카페가 수도권에 있는 카페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그래도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마지막에 인생 카페를 발견했다. 애인은 그곳에서 인상을 받아 그림을 그려 인스타그램에 올렸고, 카페 사장님이 그 그림을 구매하기도 했다.
다녀온 후 새로운 지역을 둘러보니 재미도 있었고, 좋았다. 그래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곳에 정착해서 살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 국내에 가지 않은 지역이 많기에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그 후 한 달 살기는 당분간 안 할 줄 알았는데, 마침 순천에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봤다. 프로그램에 참여할 시 식비도 제공하므로 여행비를 아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해서 순천에 가게 되었다.
워낙 많은 프로그램이 있어 그것을 소화하다 보니 여행보다는 프로그램에 가까웠다. 정말 자유롭게 여행을 하고 싶으면 프로그램이 없는 게 좋다. 그렇지만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차로 같이 이동했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순천의 지역 곳곳을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프로그램의 취지는 여유롭게 쉬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었다. 사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도 개인 일정을 소화하느라 바빴고, 온전히 프로그램에만 집중하기는 어려웠다. 나중에는 체력적으로 부침이 있었다. 그래도 한 번 하기로 한 이상 성실하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한편으로 참여자 중에 나 혼자만 남자였다. 애인은 쉐어하우스에서 룸메이트들과 함께했지만, 나는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 거의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애인과 종종 시간을 보냈다. 네트워킹을 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다. 그래도 그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청년마을에서 추구하는 가치 중 하나가 제로웨이스트였다. 그곳 역시 지원사업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어서 어떤 프로세스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지를 배웠다. 나 역시 이후 청년단체에서 스태프로 참여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임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후 나주의 대학교에서 디지털노마드를 위한 10일 살기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 프로그램까지 참여하고 장기 여행을 마쳤다. 코로나가 끝나면서 한 달 살기 프로그램도 이제는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오히려 참여자가 부족해서 모집 기간을 연장하거나나, 프로그램 운영이 안 되기도 했다. 그런 프로그램에도 참여할까 싶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서 나중을 기약했다.
세 번의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가보지 못했을 지역을 갈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러면서 더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어차피 지금 하는 일은 지역에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에 지원만 된다면 해외로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당장은 여의치 않기 때문에 상황을 보기로 했다.
수십 년간 집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던 내가 국내를 이토록 돌아다니게 될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애인과 함게 데이트를 하면서 공간에 대해 관심을 갖게 시작하고, 이제는 지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의 관심은 호기심에 가깝다. 내가 보는 눈을 키운다 지금 하더라도 이미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사람들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관점으로 지역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지방은 소멸의 위기를 겪고 있다.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은 지역민을 유입시키기 위한 정책 중 일부다. 나와 애인도 지방 정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내 경우에는 수도권에서만 살았고, 수도권 중에도 대부분 시골에 속했기 때문에 인프라는 크게 상관없다. 기껏해야 도서관이 가까운 곳에 있으면 좋다. 그렇지만 애인은 이미 여러 군데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 마트가 가까이 있어야 하고, 산책로도 있어야 하고, 음식점도 많아야 한다. 그러한 조건들은 다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다. 프리랜서이기에 일자리에 구애받지 않을 것 같지만 프리랜서일수록 오히려 대부분의 기회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일을 의뢰하는 곳이 대부분 수도권에 있기 때문에 수도권에 머무르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럼에도 지방 살이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정착 프로그램이 있고, 무엇보다 집값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격으로 지역에 정착할 수 있다. 인프라는 뒤쳐진다 하더라도 그만큼 자연도 있고, 사람이 많지 않아 여유가 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기 어려운 이유는 아직 우리 둘 다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구 하나라도 비대면으로 꾸준히 수입을 얻을 수 있다면 과감하게 이동할 법하지만 그렇지 않은 한 쉽게 떠나기가 어렵다. 한편으로 나 역시 언저리에 살긴 했지만, 경기도가 고향이다. 이곳을 떠나면 그나마 지금 만나는 친구들하고 연락이 뜸해질 것이다.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만 아예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게 두렵기도 하다.
이곳을 떠난다고 해서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 어렵다. 결국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하면서 돌고 돌아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생각보다 좋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멋대로 애인에게 안을 제시했다. 여건이 된다면 국내의 저렴한 지방을 베이스캠프로 잡고 해외를 떠돌아다니면서 디지털 노마드 생활을 하자. 그런 여건이 마련될 때까지 수도권에 머무르면서 최대한 능력을 키우자.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어 하는 애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언제 유명 여행 크리에이터처럼 떠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