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을 하면서 빌런을 많이 만났다. 물론 빌런이라 하는 것은 내 생각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생각한 게 틀리지 않았구나 싶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그다지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들 중에 나에게 크게 폐를 끼친 경우는 없다. 아무래도 내향적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벽을 치고, 그렇다 보니 상대도 경계를 한다. 선을 넘어오려는 사람 중에 빌런이 꽤 있기는 했다. 그런 사람은 나도 마음을 두지 않아 결국 멀어지게 된다.
빌런에 대한 마음은 애증이다. 커뮤니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빌런이 없는 것이 좋다. 사람들끼리 친해질 때는 빌런은 씹을만한 좋은 희생양이지만 그렇게 친해진 커뮤니티는 결국 빌런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빌런의 반대편에서로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나도 적극적으로 이야기에 동참하기도, 암묵적으로 동의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도 그 사람의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시행착오를 겪었다. 대학에서도 사람들과 관계가 끈끈하지 않았다. 군 복무를 했을 때도 관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전역을 하고 나서 사회에 연결된 사람들은 대부분 고등학생 친구들이다. 그렇지만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도 자주 보기는 어려웠다.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경험이 적었다.
몇몇 사람은 고등학교의 끈끈한 친구 관계가 부럽다고 한다. 내가 다닌 학교는 특수한 환경이어서 같은 반 친구들과 3년의 시간을 같이 보냈다. 그렇지만 내향적인 성격 탓에 친구들과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졸업 후에 중심에서 멀었던 친구들은 전부 흩어졌고, 나처럼 주변에 머물던 친구는 어설프게 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이따금 어울려도 약간의 벽을 느꼈다. 그들의 행동에는 어느 정도의 선이 있었다. 그게 뭔지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이미 그들은 어느 정도 사람들을 만난 경험이 있기에 그런 경험이 행동에 배어 나왔다.
그러다 친구들에게 실수를 저지른 적이 있다. 이십 대 중반에 함께 술을 마시고 나서 술주정을 부린 것이다. 거기에 친구들은 질려했다. 대학생 때 저지를 만한 실수를 저지르니 평소에도 이러고 다닌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어리숙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후에도 몇 번 만나기는 했지만 그런 경험의 차이 때문인지 친구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다.
그 후 독서모임에서 사람들과 친해지고 나서도 취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럭저럭 케어를 받았다. 그때 비로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어느 정도 선에서 행동해야 하는지를 익혔다. 인간관계는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겪으면서 배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나이가 많은데 실수를 저지르면 나잇값을 못 한다고 한다.
고립의 경험은 곧 사회 경험의 부재이고, 그런 이유 때문에 고립청년이 사회에 나오면 그 주변의 사람이 감수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빌런이라 낙인찍으며 그 사람을 슬그머니 피한다. 그 입장도 이해는 된다. 자기도 힘든데 매번 남들에게 도움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편으로 그런 빌런을 만나면서 크게 데인 경험이 있으면 굳이 빌런 후보자를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요즘 같은 각자도생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기도 힘드니 내가 생각해도 그게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렇지만 사회로 막 나온 고립청년의 경우 그런 경험이 큰 배반의 경험이다. 그런 경험이 반복될수록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자책한다. 그래서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할지 고민한다. 애인의 경우에는 대부분 상냥한 편이다. 심지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것 때문에 애인은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한다. 애초에 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친절을 베푸는 게 어색하다. 여러 활동을 하면서 이제는 친절을 베풀 만한 에너지도 없다. 그래도 내 방식대로 친절을 베풀 수 있다.
나는 내 기준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잘해준다. 물론 상대를 그렇게 판단하는 게 오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판단하고 나서도 그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받은 환대를 또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라 생각한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빌런의 문제는 관계나 행동이 미숙한 경우가 많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나 역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마다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미 행동 습성이 굳은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관계 경험이 부족한 경우 인간관계만 경험해도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에 따른 부담을 감수하는 것이 주변 사람의 몫이면 어렵기는 하다. 그래서 빌런 전담 상담소 같은 게 있으면 어떨까 상상한다.
한편으로 빌런이 왜 빌런인지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어느 빌런의 경우 자신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기에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갈구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 한 문제를 두고 계속 고민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평가에 쉽게 좌지우지한다. 그런 것도 괜찮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다가 어느 순간 돌아보면 자신을 부끄러워할 날도 올 것이다. 나 자신도 인정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을 아는데 꽤 오랜 기간이 걸렸다. 그렇기 때문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