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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동 Apr 14. 2023

화왕산 그 진달래꽃에 파묻힌다

100대 명산 다섯 번째

지난 3월 창원 무학산 산행에서 만난 성마른 진달래꽃에 미련이 남아 이번 산행은 아예 진달래꽃구경을 위한 산행으로 계획했다. 그래서 100대 명산 중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몇몇 산 중에서 창녕 화왕산을 이번에 다녀왔다. 진달래꽃은 보통 4월 중순에 절정을 이룬다는데 올해는 벚꽃도 한 열흘 정도 앞서 피기도 했고, 무학산 아랫자락에 피었던 진달래꽃도 3월에 움을 티우는 것을 볼 때, 조금 빨리 가야 할 듯하여 4월 9일에 다녀왔다.

이번 산행 코스는 자하곡매표소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1 등산로를 통해 올라가다, 배바위와 화왕산성 남문을 거쳐 진달래군락지인 허준세트장 그리고 세트장 뒤편 천문대를 지나 화왕산 정상까지 가며, 하산은 완만한 3 등산로를 이용해 내려와서 도성암을 구경하고 자하곡매표소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원점회귀 코스로 다녀왔다.

총거리는 약 9km 정도이며, 시간은 쉬엄쉬엄 구경하며 걸어 약 6시간 정도 걸렸다.


우리 일행이 자하곡매표소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8시경, 이곳의 아침 날씨는 울산 보다 더 추운듯하다. 주차장 주변에 있는 나무들은 아직 꽃 피긴 이르다고 말하는 듯하여 꽃구경은 내년으로 미뤄야겠다 생각했다. 대신 화왕산의 유명세에 비해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산객들이 많지 않아 한적하니 참 좋았다.

1, 2 등산로가 갈라지는 갈림길 입구 양 옆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이 조형물은 뭔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가오나시 같기도 하고 제주의 돌 하르방도 아니고 도깨비라 하기엔 뭔가 어색하고 모르겠다. 설명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도깨비 같은 친구를 뒤로하고 1km 내외를 오르니 자하정이 나온다. 일행 중 여행사를 하는 친구가 ‘자하는 보랏빛 노을이 있어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한다’ 한다. 옛날 양반님들이 이곳에서 산 아래 황금 들판과 저 멀리 긴 산자락에 걸린 붉은 저녁놀을 보며 이름 지었으리라 싶다. 비록 지금은 아침이라 저녁놀이 산자락과 들판을 물들이는 광경을 볼 수 없어 아쉽긴 하지만, 본격적인 경치는 이 자하정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다.

화왕산 1 등산로에서 만나는 풍광은 북한산과 경주 남산 그 중간 어디쯤 같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힘센 장정이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하듯 툭툭 불거진 기암괴석은 나의 발걸음을 계속 붙들어 올라갈 수가 없다. 사진으로는 눈으로 감상하고 느끼는 것의 일부도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자하곡 1 등산로는 자기 등산화의 접지력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좀 더 짜릿하고 다이내믹한 산행이 될 듯하다. 아주 매력적인 1 등산로를 지나 산불감시초소에 이르면서부터는 또 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여행사 친구와 비들재 암능길 안내판을 보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온다. 암 수술 후 회복 중인 친구가 분명 우리와 1코스 끝지점에서 함께 휴식을 취하고 같이 출발을 했는데 반대방향인 비들재로 내려가버린 것이다. 그렇잖아도 힘겹게 걸어오는 친구라 우리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늘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린 것이다. 요즘이야 전화가 있느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친구의 기력도 회복할 겸 배바위 근처에서 준비해 간 김밥을 나눠먹었다.

우리 일행 네 명중 나머지 한 친구는 우리를 기다리는 긴 시간 동안 배바위 안내판을 읽고 또 읽어 우리에게 열심히 배바위에 얽힌 전설을 설명해 주었다. 옛날 물난리 때 배를 묶었다 하여 배바위라는 것과 곽재우 장군이 세수했다는 전설이 있는 홈에 물이 항상 고여 있다는 말을 했다. 울산 무룡산 앞에 매봉이 있는데 이 매봉도 물난리에 모두가 잠겼을 때 그 산에 매가 앉았다 하여 매봉이다. 이 처럼 곳곳에 이런 노아의 방주와 같은 전설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어느 때 큰 물난리가 나긴 난 모양이다.

배바위는 바위 자체는 그리 험하진 않으나 워낙 높은 낭떠러지인지라 약간의 배짱이 있다면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을 듯하다.

   

배바위를 지나면서부터는 가야의 산성인 화암산성과 넓은 억새밭이 펼쳐진다. 억새를 보호하기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 억새 태우기 행사를 매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화암산이란 이름 자체에도 불이 들어 있다. 그러니 불과는 매우 인연이 있을 터인데, 화암산 억새 태우기를 계속했다면 지금과 같은 억새 보호를 위한 통제를 하지 않아도 잘 자라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 본격적으로 진달래꽃을 보러 허준 세트장으로 간다. 이곳에서 어떤 장면을 촬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세트장 앞의 언덕은 진달래를 인위적으로 조성한 듯하다. 빽빽하게 들어선 분홍의 진달래꽃과 억새의 황금빛의 조화는 너무나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진달래 숲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진달래꽃을 보기 위해 이곳 화왕산을 찾은 우리 50대 중반의 중늙은이들은 정작 이 진달래꽃 군락 앞에선 별 감흥이 없다. 남자란 참 재미없는 동물이다. 이제 우리는 허준 세트장을 뒤로하고 천문대를 지나 화왕산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화왕산 정상을 앞두고 걱정바위라는 이름의 재밌는 바위가 있다. 그렇잖아도 내 뜻대로 안 되는 아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인 친구들은 걱정바위 앞에서 위로라도 받나 보다. 저 바위얼굴은 얼마나 걱정이 태산인지 눈이 한 자나 푹 들어가고 힘없는 입은 다문 것도 연 것도 아니다. 참 누가 이름 지었나 모르겠으나 그 사람도 걱정이 많았나 보다.

화왕산 정상석 앞에는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이어져 있다. 오늘 봄꽃구경도 화왕산 정상을 끝으로 다 한 듯하다. 이제 3 등산로를 이용해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3 등산로는 완만한 경사길로 평이한 산길이다. 올라올 때 만난 화려한 1 등산로에 비하면 밋밋함 때문인지 다소 지루한 느낌도 든다.

3 등산로가 끝나는 지점에 만나는 도성암. 절은 고즈넉하고 크지도 작지도 않지만 찾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나는 절에 가면 법당 처마와 하늘과 산을 함께 올려다보길 즐겨한다. 우리네 절의 단청은 그냥 보는 것보다 이렇게 하늘과 산을 같이 보면 어디가 우리 인간의 영역인지 어디가 신의 영역인지 모르게 된다. 태국 사찰의 황금색이 주는 맛보다 우리네 단청의 소박하면서도 화려함이 내겐 더 마음이 끌린다.

자연을 닮은 단청처럼 죽어서의 천국, 죽어서의 정토세상보다는 이 땅이 천국과 정토를 닮기를 바라본다.


도성암을 끝으로 창녕 화왕산 산행을 모두 마쳤다. 올라갈 때의 다이내믹하고 화려함, 정상에서의 광활한 억새밭의 여유로움, 내려올 때의 차분함과  도성암으로 이어지는 화왕산 산행은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 싶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아름다움을, 산전수전 다 겪은 후 인생의 정점에서 느끼는 여유 그리고 그간의 삶을 돌아보는 시기의 차분함과 고요함.

진달래꽃구경을 위해 시작한 산행이 생의 여행을 함께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좋은 산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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