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명산 여섯 번째
지난 4월에 다녀온 화왕산 산행은 진달래꽃의 끝자락을 겨우겨우 부여잡고 간신히 꽃을 볼 수 있었다. 하여 이번 황매산 산행은 서둘러 가려했으나 동문회 체육대회로 일주일 그리고 주말에 내린 비로 일주일을 보내버리고 꽃 본다는 마음은 포기하고 철쭉축제 마지막날 황매산을 찾았다.
울산에서 2시간 조금 더 걸리는 시간을 달려 합천군 덕만주차장에 도착하니 이곳 주차장은 대형버스 전용이라 주차를 못한단다. 승용차는 매표소를 지나 산으로 올라가면 주차장도 많고 주차할 곳이 많다고 그리로 가라 한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산아래에서부터 걸어 올라갈 계획인지라 주차장 앞 도로 갓길에 주차를 했다.
당초 우리 산행계획은 덕만주차장에서 출발하여 황매정사, 돛대바위를 지나 모산재와 철쭉군락지를 거쳐 베틀봉, 황매산정상에서 중봉을 지나 하산하며 할미산성을 돌아 다시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황매정사 쪽보다는 순결바위를 보기 위해 그 앞쪽 갈림길에서 순결바위로 해서 모산재로 올라가는 코스로 계획을 바꿨다.
덕만주차장은 관광차에서 내린 산악회 사람들로 인해 몹시 붐볐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산악회 사람들이 가는 방향을 따라가며 보니 그들이 가는 방향과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른 듯하여 그들은 위로, 우리는 아래로 갔다.
그런데 이곳은 등산로라기 보단 농지뿐인지라 여기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때마침 밭에 일하는 분에게 순결바위로 가는 길을 물으니 쭉 내려가며 된단다. 나중에 길을 찾고 보니 애초에 덕만주차장에서 그 사람들을 따라 올라갈 것이 아니라 도로를 따라 50~100m 정도 내려가다 개울을 건너면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등산길은 초입만 찾으면 절반은 된 거다.
고만고만한 산길을 따라 조금 걷자니 국사당이란 팻말과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위하여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는 곳'이란 설명이 있다. 당시 이곳 고을은 요즘말로 이성계 라인이었나 보다. 당시로는 역성혁명이 일어나는 상황이고 자칫 실패라도 한다면 여럿 목이 달아날 판이니 천지신명 아니라 뭐에라도 몰래 기도를 올렸으니라. 그렇다면 이곳은 당시엔 꽤나 으슥하고 은밀한 곳이었지 않았나 싶다.
국사당을 지나면서는 제법 시야가 열리고 저 멀리 산아래에 영암사와 영암사지가 내려다 보인다. 황매산 자락이 감싸듯 절을 안고 또 그 앞은 못이니 이런 곳이 명당이 아닐까 싶다.
시원하게 펼쳐지는 조망을 감상하며 조금 더 오르니 순결바위 팻말이 나온다. '남, 녀의 순결을 시험할 수 있다는 곳으로 평소 사생활이 순결치 못한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으며, 들어간다 해도 바위가 오므라들어 나올 수 없다'는 설명이 있다. 이름 참 잘 지었다. 순결바위보단 여근석이 더 잘 어울릴 법도 하다. 그런데 바위가 참 묘하다.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도 한번 들어가 봤지 않았을까 싶다. 이 나이에 순결이 뭔 소린가 싶지만 바위틈이 위는 넓지만 아래로 내려가면서 좁아지고 넓어지는 것이 한번 들어가고 싶어 진다. 10년만 젊었어도 도전해 보겠건만 아서라!!.
산길은 계속해서 바위길의 연속이면서도 그리 급하거나 사납지가 않다. 그래도 바위 끝에 용기를 내어 서보니 손끝이 찌릿찌릿한 것이 제법 스릴이 있다. 반대편 골짜기에는 사람들이 돛대바위를 향해 개미떼처럼 줄지어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손자병법에 '장수가 분을 이기지 못하여 병사들을 개미떼처럼 성벽에 오르게 하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곳에서 보니 왜 개미떼라 했는지 이해가 된다.
멀리서 보는 돛대바위는 정말 돛대 같다. 모산재에서 다시 내려가 돛대바위를 볼까도 생각했으나 갈 길이 멀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는 멀리는 보는 것이 더 돛대 같을 것 같아 마음을 고쳐 먹었다.
모산재에 도착하니 내가 생각했던 그런 재가 아니다. 여긴 재라기보다는 암봉이다. 안내판에 '모산재의 옆과 뒤에 여러 개의 고개가 있고 재와 재를 잇는 길 가운데에 산이 위치한 탓에 산보다는 재로 인식된 것'이란다. 조금은 이해가 되나 모산재 산신령은 기분이 좋지 않을 듯하다.
모산재를 지나면서부터 철쭉군락지가 펼쳐진다. 끝없는 군락지다. 그런데 꽃은 온 데 간 데 없다. 박제가 된 몇몇 꽃이 화려했을 옛 기억을 보여준다. 이곳부터는 오토캠핑장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의 소음, 음악소리, 전국의 산악회 사람들이 달고 온 배낭의 깃발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조금은 아쉽다. 한 달에 한 곳 씩 100곳을 다 돌려면 족히 10년은 걸릴 텐데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베틀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하늘계단이란 이름의 대리석으로 만든 계단이다. 주변이 억새와 철쭉으로 이루어진 군락지라 혹여 화재가 걱정되어 돌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우악스럽다. 철쭉군락지를 사이에 두고 합천군과 산청군에서 각각 만든 캠핑장과 주차장은 관광수입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작은 지자체의 입장은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고민을 덜 한 것 같아 아쉽다.
좁은 황매산 정상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너도나도 표석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축제 마지막날이 이 정도니 절정기엔 어땟을지...
정상을 지나 삼봉으로 가는 길목에 때 놓친 나그네를 반기는 철쭉 몇 그루가 수줍게 피어있다. 온통 붉게 물들어야 맛인가 아쉬운 듯, 수줍은 듯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황매산에 오기 전 지도에 황매산 다음이 삼봉, 상봉, 중봉으로 되어있어 지도에 표시를 잘못했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보니 삼봉이 맞다. 낙타 등에 난 봉처럼 볼록볼록 바위봉 세 개가 나란히 있다. 우회하는 길도 있었지만 우리는 삼봉으로 갔다. 릿지길을 조금은 맛볼 수 있는 길이었다. 앞에 가는 사람을 추월하여 갈 수 없으니 사람들이 많을 때는 우회하는 것을 권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기다리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보냈다.
삼봉은 '황매산 정기를 이곳으로 총 결집하여 세 사람의 현인이 태어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곳으로 누구나 이 세 봉우리를 넘으면서 지극정성으로 기원한다면 본인이나 후손들 중 훌륭한 현인이 될 것이라 믿는다'라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겐 이제 기회가 없다. 현인을 낳아줄 아내는 너무 먼 길을 떠나버렸으니 어찌할고.
올라올 때 툭툭 불거진 근육질 남성의 능선을 지나고, 눈 시리게 붉었을 철쭉꽃 군락을 지나 황매산의 기가 총 결집한다는 삼봉을 넘어서면 산은 순하디 순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동안의 모습이 너무 화려했던가 순한 산의 모습은 지루한 감 마저 든다. 한참을 내려오니 할미산성 팻말과 함께 돌무덤에 세워놓은 탑이 나온다. 옛날 신라와 백제가 전투했다는 전설이 있단다. 황매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화왕산엔 가야의 성이 있고 이곳에선 신라와 백제가 전투를 했다 하니 까마득한 그 옛날 사람들도 참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우리의 산행도 덕만주차장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났다. GPS 거리 16.98km, 총 시간 6시간의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지난번 화왕산 산행에선 울산에서 창녕까지 한 시간이 넘게 달려와선 산행만 하고는 곧장 돌아간 것이 많이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곳도 좀 둘러봤다. 그러나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 했던가 당체 뭘 해야 할지 몰라 합천 합벽루에 송시열의 글이 있다 하여 찾아갔다.
흐르는 듯 멈춘 듯 유유히 흐르는 황강 그리고 강 건너편에 펼쳐진 백사장과 드문드문 강가에 나와 노니는 사람들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하다. 앞으로 길어야 10년 정도면 나도 삶의 최전선에서 한발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 그 물러나 살 자리를 찾는 것도 내가 100대 명산을 도는 이유 중 하나다.
길어야 4~5년 뒤면 딸들도 그들의 날개로 둥지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갈 것이고 그때가 되면 온전히 혼자다. 딸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단독자의 삶, 그 길을 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합벽루에 올라앉아 고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자전거에 도시락 하나, 책 한 권 싣고 이 루에 올라 졸다 읽다 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