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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동 Nov 17. 2023

일몰, 바다, 다시 만날 기약

홍성 여행

자연은 항상 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처지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겠지. 동해안 자락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로서는 바다로 해가 사라지는 모습을 여간해선 보기 어렵다.

이번에 충남 홍성에 갈 일이 있어 오후 4시쯤 끝나고 서둘러 달린다면 한용운선생도 보고 궁리항에서 일몰도 볼 수 있으리라.

서산에 해가 걸릴 무렵 도착한 한용운선생의 생가는 늦가을의 정취와 만나 고즈넉하다. 큰 산이 별로 없는 서해에서 이 정도면 예전엔 제법 첩첩산중이었겠다 싶다. 단출한 초가지붕과 포근히 감싸 안고 있는 뒷산은 서로를 많이 닮았다.

이곳에 오는 동안 제법 너른 들판을 보며 여기 살았으면 배 곪진 않았겠다 싶었지만 들판을 다 지나고 산골 중에서도 제일 끝자리에 움츠리고 있는 세 칸 초가집을 보니 많이도 궁벽했으리라 짐작된다.   

떨어지는 해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음에도 한용운선생의 생가지를 찾은 이유는 단 하나 '님의 침묵'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배울 땐 님이 조국이네 뭐네 하였지만, 지금 내게 님은 바로 '님' 그 자체다. 눈이 시리게 마알간 햇살이 쏟아지는 가을에 내님은 시처럼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대신 나는 한용운선생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말이 듣고 싶어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도 아랑곳 않고 달려왔다.

생가 앞 선생의 동상 아래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

위로가 된다.

이것으로 족하다.


이제 차를 궁리항으로 몰았다. 기상청 일몰 시간은 오후 5시 25분. 남은 시간은 10여분 정도 된다. 한적한 곳이라 차 막힐 염려는 없으니 별일이 없다면 볼 수 있겠다 싶다. 가는 내내 두꺼운 구름에 걸려있는 해는 내게 일몰의 장관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

예전 아이들 어릴 때 온 가족이 팽목항을 찾은 적이 있었다. 해가 진 쓸쓸한 팽목항에서 차가운 바다를 한없이 바라봤었다. 그때 우리는 일몰 구경보다는 희생된 아이들의 아픔에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차 뒷유리에 붙인 리본은 해지고 낡아 일부만 아직 남아 있고, 내 아이들은 서울로, 엄마는 하늘로 나만 조금 남은 리본이 달린 그 차와 함께 서해 일몰을 보기 위해 바다로 가고 있다.


같은 해와 같은 바다임에도 동해의 일출은 희망을 꿈꾼다면 서해의 일몰은 삶을 돌아보게 한다. 항상 하는 자연은 무시로 돌아가건만 이를 보는 나는 항상하여지질 않으니 이것이 슬프다.  

궁리항에 도착했을 때 해는 바다가 아니라 구름 속으로 숨어 들려하고 있다. 아무래도 구름이 너무 두꺼운 것 같다. 바다와 구름과 나를 붉게 물들이는 일몰을 상상했었는데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해는 내게 또 오라 한다.


이제 해도 넘어갔고, 홍성에 오기 전 예산이 고향인 분에게 '홍성에 가서 하나를 본다면 어디를 갈까?'하고 물었을 때 간월도를 추천했다. 울산 영남알프스에 간월산이 있고 이곳엔 간월도가 있다. 두 곳은 한문으로는 서로 다른 '간'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울산의 간월산의 유래가 되는 간월사의 '간'자는 이곳 간월도와 같은 '看'자를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달을 보기 좋았나 싶기도 하고.


천수만 도로를 타고 바다인지 땅인지 모를 도로를 달려 간월도에 도착했다. '도'자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섬인 듯하나 지도를 아무리 봐도 도무지 섬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딜 가야 하나?'


주위는 아직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엔 조금 이르다. 새벽의 블루인지 저녁의 블루인지 알듯 모를 듯 한 시간, 차에서 내린 중 늙은 남자 하나는 참 쓸모없나 보다. 식당들 그 어디에서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딱 봐도 견적이 나오는가 보다.

바다에 데크로 길을 만들어놓은 것이 뭔가가 있을듯하다. 어차피 갈 곳도, 오라 손짓하는 곳도 없는 나그네는 무작정 데크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재미난 섬이 아니 절 하나가 바다에 떠 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에서만 볼 수 있는 풍광이겠다. 지금은 바닷물이 들어찬 모양이다. 절은 완전히 섬이 되었다. 승복을 입은 누군가가 심심한지 잠시 절문밖을 나와 그 짧은 길을 바라보고는 들어갔다.

이 절을 지은 스님은 참 재미난 분이었을 듯하다. 속가도 아니고 승가도 아닌 그 어느 곳, 낮에 불공드리려 온 아낙의 얼굴이 아른거려 산문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도 바다가 허락지 않으니 절로 고행이 되겠다 싶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 편에

빨간 석양이 물들어 가면

놀던 아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집으로 하나둘씩 돌아가는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나"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 노랫말을 읊조리며 나도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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