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고 갈래?
프롤로그.
1. 나는 현재 제주도라는 섬에서 AC 회사의 대리로 일하고 있다.
내가 있는 타운에는 37개의 스타트업이 입주해 있고, 나는 그들의 출석과 매출을 관리하고, 시청에 보낼 중요문서들을 작성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며, 가끔은 텅 빈 건물을 채울 영상 콘텐츠를 만든다.
누가 보면 행정과 스타트업 사이를 오가는 그냥 성실한 직장인의 비슷한 하루겠지만, 나는 늘 다른 문장을 마음속에 숨기며 살아왔다.
“3년이 될지, 13년이 될 지는 모르지만.. 모든 것은 잠시 멈춰가는 항구일 뿐, 나의 세계는 더 위대할 것이다.”
나는 수도권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다.
생계를 위해 강남역 일대의 레스토랑, 카페 알바와 물건 판매 영업을 전전했고,
그러다 어느 해는 TV만화 대본을 쓰고, 어느 해는 계약직 공무원이 되어(2015년) USB와 무거운 카메라, 서류 더미 속에서 야근을 하다가 회식 자리 2차 노래방에서 템버린을 흔들며 구슬프게 노래하는 대머리 과장님을 보며 현타가 오기도 했다.
2018년 제주에 와서는 뭐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타는 목마름으로 영상제작 회사를 창업했다.
'레몬'이니, '골든' 이니, 회사명을 바꿔가며 지역 홍보영상, 독립영화, 시청 유튜브 채널 등을 기획하고 제작하며 생명줄과 같은 수의계약을 따내기 위해 억지 '인간미'를 뿜뿜하며 발을 넓히던 시간.
나는 그렇게 30대를 맞이했다.
- 20살 부터 30대 초반까지 이 시절을 관통하는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은 10년 후 공개를 기약한다.-
나의 20대는 가난했고,
치열했고,
자존심 세고,
정신없고,
중심도 없었다.
그 뜨겁고 방황하던 세월이 15년이었고,
그 중 절반인 7년의 세월을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주에서 버텨온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꿈꿨다.
유명해지고,
세상의 신뢰와 사랑을 받고,
칭송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욕망이 있었고, 지금도 일부는 여전하다.
내가 잘하는 건 상상하고 표현하는 일,
망상에 빠져 그것을 글로 끄적여내는 일.
그러니 당연히 나는 얕은 머리를 굴려보길..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해야 성공하기 빠를 터였다.
그래서 10대에 선택한 꿈의 직업이 바로 ‘영화감독’이었다.
영화학과 중 꽤 BEST로 인정받던 수도권 대학에 입학했다.
어리숙한 20대 초반에 나는 내 전공 학문이 꽤나 '있어' 보였다.
몽글몽글하게 피어나는 예술의 역사와 이미지들이 한껏 내 가슴을 부풀게 하고, 화려한 포장지를 두르게 해줄 것 같았다.
정석의 루트를 걸어나오면, 언젠가는 유명해져서 방송에도 나오며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감독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볼 수 있었다.
그곳의 나와 같던 대단해 보이던 선배들, 동년배들 역시 겉멋과 허세로 버티는, 얕고 철없고 미성숙하고 어린 존재들이었음을.
아무래도 연극영화과에는 외모가 출중한 학생이 많았고, 껍데기의 힘을 일찍부터 배울 수 있는 분위기였다.
‘개족보’라는 말이 농담처럼 떠돌았고, 실제로 그 아무것도 아닌 인기 때문에 그들이 뭐라도 되는냥
'있어'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1학년 주제에 제일 권력있는 전년도 과대표를 사귀게 된... 화제의 인물이기도 했고,
동시에 주류에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 학기는 전공 대표를 맡았고, 그 타이틀이 더해준 점수로 인해 영국 어학연수도 짧게 다녀왔다.
어느 날
당시 처음으로 사귀었던 4학년 선배를 따라 충무로의 영화제작 사무실에 가게되었다.
인맥따라 채용되는 당시 충무로 구조에서 나는 이미 줄 하나를 잡은 듯 했다.
그곳에서 감독 입봉을 준비하는 40 중반의 남자선배와, 조감독 입봉을 하는 이제 40의 남자선배를 줄줄이 만났다.
영화의 주연배우는 유명한 ooo이 되었고, 투자는 00금 이라는 둥 - 어깨뽕 차오르는 허세가 그 남자 선배들을 이끄는 곳은 여자와 연애와 유흥으로 보였다.
나는 스무 살 초반의 신입생이었는데, 당시 그 곳의 선배들에게서 왠지 역하고 쩌든 냄새를 맡았던 것만 같다.
그때부터였을까?
내가 꿈꿔오던 ‘영화판’의 빛깔이 이상하리만치 흐려지기 시작한 건.
두 달간 영국 어학연수를 하고 돌아와(거의 관광이었지만) 사귀던 선배를 마주한 순간, 나는 내 마음이 식었다는 걸 알았다.
그날로 이별을 고했고, 온 학교에 소문이 난 와중에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 왠지 쩌든 냄새가 나던 조감독 입봉을 앞둔 갓 40의 충무로 선배님- 이었다.
헤어진 소식 들었다느니, 위로주를 사주겠다며 불러냈고, 그 자리에서 나는 성추행 상황까지 갔다.
하지만 조상이 도운 걸까, 신이 도운 걸까.
참 웃기는 상황으로 나는 그 자리에서 기적적으로 도망쳐나왔다.
다음날,
나는 그 사실을 헤어진 선배에게 알렸고, 그는 그 선배들 아래에서 일하지 않기로 약속한 후 정말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영화 한편으로 감독과 조감독 데뷔를 한다던 그 선배님들은 그 후 아무런 좋은 소식도 없었다.
물론 아무 관심도 없었다.
다만 당시 준비하던 화제의 영화는 다른 감독과 다른 제작진들의 이름으로 5년만에 완성되어 개봉되었다.
중도에 실패했거나 밀려났겠지.
나는 상업영화 연출부 막내로 시작하려던 계획을 집어던졌다.
그렇게 나는 어느 날.. 서울 관공서의 영원한 계약직 자리도 던져버리고,
자의 반 타의 반, 타인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제주에 오게 되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상상'의 힘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독립영화를 결국 몇 편을 제작했다.
그런데 사실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진짜 내 꿈은 '영화감독' 이 아니라, '풍요와 사랑과 명예' 라는 것을.
2017년,
서울에 살던 시기에 영상제작를 주종목으로 하는 1인 회사를 창업했다.
그걸 그대로 제주로 들고 내려왔다.
먹고 살 길은 막막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설득하고, 관계를 만들며 일종의 ‘인간 관계 도를 닦는’ 시간을 보냈다.
단 한명의 연고도 없던 이 섬에서 창업한 그 해에 특화된 기술이나 플랫폼 하나 없이
오직 개인 블로그 홍보와 발로 뛰는 인맥 영업으로 8천만 원의 계약을 줄줄이 따내고, 작업물을 전달했다.
교만한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내가 목표로 삼은 지역, 단체, 특정인과 대화를 트고 가까워지고, (제주에서 동네 이웃,어른을 통칭하는 단어)'삼춘들'과 마치 '똘'(제주방언으로 '딸')의 역할극을 하며 나름 돈돈한 거래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는 사람의 본능과 숨겨진 욕망에 씌워진 포장지를 벗겨내고 속 알멩이를 간파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내가 나 자신의 본능과 욕망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7년간 섬과 육지를 오가며 일했고, 갑자기 벌었던 돈은 80프로 이상 남에게 줘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 돈은 자진해서 헌납했지만, 그렇게 몽땅 줘버리고 난 후 나는 지금껏 쌓아온 모든 관계를 뒤돌아 섰다.
정말 '식구'라고 믿었던 관계의 본질 - 결국은 돈이었다.
10년을 지속해온 인간 관계를 모두 단숨에 정리하고 나니, 그제야 나는 내 욕망의 물밑에 남아있던 '감독' 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미련마저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운명처럼, ‘돈의 세계’로 진입했다.
이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그 날들.
푸릇푸릇 순수한 마음으로 나름 정치에 뜻을 품고 있던 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떤 회사에서 새로 지어지는 센터에 이런이런 일을 한 말한..사람을 찾는다고 하던데요?.”
나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지인이 연결해준 한 사람을 만났고, 그 다음 주에 지금 내가 소속된 회사의 대표님을 만났다.
그 후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했다.
돈을 벌고자 하는 스타트업을 관리하고, 공간을 운영하는 일.
나도 한때 대단한 기술도 자본도 없이 버티고 버틴.. 7년 차 스타트업의 대표였던 사람.
스타트업도 결국 ‘사람’이다.
좋은 것도, 위험한 것도, 성장의 본질도
모두 ‘사람’에게서 파생된다.
요즘은 시스템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그 완벽한 시스템 마저 오류를 일으키게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운명을 이끄는 건 단지 타고난 팔자가 아니라 단 한가지- '태도',그리고 '지혜' 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본질은 사람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짓고있는 형태가 온통 ‘물질’이다.
인간의 육체도, 집도, 공기도, 음식도, 입은 속옷도, 모두 물질이다.
물질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다.
그리고 그 물질의 세포가 바로 ‘돈’이다.
아직도 그런 사람이 많다.
사실 돈을 갈망하면서, 돈을 미워하고, 돈을 이미 가진 자들을 혐오하는 사람들.
그러나
돈을 미워하기에, 돈은 너무나 정직하고, 정확하다.
대부분 비루하고, 비겁하고 솔직하지 못한 사람 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보았다.
하루 종일 돈을 꿈꾸면서도 자신이 가난한 이유를 항상 뭔가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
모두가 서로를 돕는 따뜻하고 공평한 세상을 말하면서, 나보다 더 성공하여 누리는 자들을 악으로만 치부하는 공평하지 못한 생각을 보유한 사람들.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대장을 돌아서서 비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
자신을 대체할 존재가 없을 거라며 존재감을 채우는 어리석은 사람들.
나는 그런 풍경을 보며 매일 스스로 다짐한다.
나는 나 자신만큼은 속이지 말자고.
[돈이 없어 라면으로 한끼를 떼울 떼 누군가는 '남 탓'을 한다.
'정부가 경제를 망쳤다.' '대기업이 소상공인을 죽인다.' '경제가 나빠서 장사가 안된다'며..
그러나 나는 라면으로 한끼를 떼워야 하는 순간에 다른 생각을 하기로 선택했다.
'삼양 다음으로 한국라면을 해외에 수출해 성공할 기업은 어디일까?'
그리고,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비싼 오마카세보다 '역시 라면이 젤 맛있다'며 까르르 웃을 것이다.]
나의 욕망은 차갑고 정확하다.
나는 가난의 그늘 속에 애써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 위안하며, 삶을 버티고 싶지 않다.
나는 풍요와 여유의 땅을 딛고 서서 그 힘으로 타인에게 베풀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나는 한 사람에게 깊이 사랑받으며 쾌락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
그러려면 제대로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한다.
‘돈’이라는 무형의 존재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내가 사랑받고 싶은 한 사람이 어떤 성향과 욕망을 가진 사람인지.
그래서 나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배움의 길을 선택했다.
바로 그 시작점으로 어느날 마주치게 된 [ VC 초기 투자 심사역] 과정부터 수료하기로 했다.
나는 창업가 체질이라기 보단 뒤에서 그들을 밀어주고, 밀어준 만큼 가치를 돌려받길 원하며 전체의 큰 그림을 조율하고, 올바른 시스템을 만들고 시작부터 결말까지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 '감독'이 역시 체질에 맞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돈'을 배우기 위한 첫 단계는 '투자' 분야이고,
내 체질에 맞는 직업군의 한 가지가 '심사역' 인 것이다.
남들이라면 여행을 갈 연차 이틀동안 나는 서울행 비행기와 강연장과 숙소에서 보냈다.
EO스쿨 플랫폼과 어느 VC 협회 주관의 초기 투자 심사역 양성 과정.
첫 O.T에서 프라이머 권도균 대표의 ‘기업가 정신’ 강연을 들었다.
주 5일 창업한 다른 회사에 출근하며 일해온 이야기.
100억 Exit을 이뤄낸 기업가와의 첫 만남.
그리고 모든 계약은 직접 한다는 대표의 일상.
나는 느꼈다.
돈이 저절로, 알아서 굴러들어오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진짜' 의 에너지.
점점 확실해졌다.
돈은 차갑고 정직한 세계의 세포들이며, 그 정직함이야말로 내가 평생 찾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첫 발을 내디딘다.
이 챕터의 끝에는 돈을 땅으로 삼아 지은 집 위에서 '사랑과 정의'의 세계를 설계하는 멍예롭고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나를 알기에, 나를 신뢰한다.
내가 돈을 사랑하고, 성공을 열렬히 추구한다고 해서
어느 '피해자' 부류의 사람들보다 삶의 감사함을 모르지 않는다.
늘 세상과 남 탓을 하는 가난한 마음의 그들보다
오히려 내가 살아 숨쉬는 매순간에 얼마나 감사한지, 그들은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때는 당당하게 외치자.
돈을 두려워하고 원망하며, 솔직하지 않은 자신을 피해자로 꾸미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향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