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언제든 널 떠날 수 있어.”
우리가 맹세를 고하던 날, 그녀는 가장 현실적인 문장을 내게 건넸다.
다짐이 아니라 경고.
과거의 그녀를 완전히 정리하지 않는다면, 빛과 어둠은 공존할 수 없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는 완고했다.
하지만 내 안의 어둠이 그렇게까지 깊은지, 그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내 의식의 책상 위는 깔끔했다.
하지만 억지로 정리한 표면 아래, 맨 아래 서랍에는 갯벌처럼 질척거리는 무언가가 눌어붙어 있었다.
그 끈적임의 이름은 ‘심심함’이다.
그녀가 없는 시간은 유난히 길다.
탁상시계의 초침은 언제나처럼 돌아가는데, 내 머리는 모래시계처럼 굼뜨게 내려갔다.
아무리 취미를 만들어 보아도, 도파민에 절여진 뇌는 아무것도 달콤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심함은 기분을 늘어지게 하고, 늘어진 감정은 다시 심심함을 토한다.
그렇게 첫 번째 틈이 생긴다.
나는 결국 그 틈으로 과거의 그녀를 불러냈다.
“딱 한 잔만.”
마녀의 주스를 입술을 맞추는 순간, 온몸이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되지?’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 뇌를 깨웠고, 나를 잃는 데 반 시간이면 충분했다.
첫 모금의 스파크는 짜릿하나,
두 번째의 끝은 흐릿했고,
세 번째의 그림자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심은 그렇게 끝났다.
‘한 번이나 열 번이나 똑같아.’
그 무책임한 한 문장과 유혹이 두 번째 틈, 포기를 쌓는다.
포기의 뒤에는 언제나 폭음이 따라왔다.
불룩 튀어나온 아랫배보다도 많은 양이 들어가면 몸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듯하고, 의식은 플라스틱처럼 허공으로 부유한다.
정신을 차려보겠다고 공원을 어슬렁거렸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벤치에 드러누워 잠들 뿐이다.
무감각.
겨울잎의 쑥스러운 아침인사가 뺨에 닿아도 일어나지 못하는 무감각.
그 위험한 질주가, 내 어둠의 표면이었다.
그러나 명분이라는 것은 참 좋은 구실이다.
사회생활, 약속, 분위기...
“적당히 마시면 되지.”
“가끔은 마셔도 괜찮아.”
그 명분이 합리화라는 세 번째 틈을 연다.
심심함의 시멘트와 명분으로 쌓아 올린 거탑은, 다음날 또다시 포기라는 벽돌을 끌고 온다.
“하루나 이틀이나 똑같아.”
“오늘만, 오늘까지만...”
포기는 폭음을 데려오고, 폭음은 다시 내 안의 어둠을 깨우고.
이 순환의 구조는 내 감정의 하수처리장을 설치하듯 아주 성실했다.
쌓고, 바르고, 올린다. 계속해서 더욱 견고하게.
아침 해가 밝으면, 나는 서랍을 닫고, 멀쩡한 책상 위의 사람으로 살아갔다.
그것이 균형 잡힌 삶이라는 착각 속에서.
꼭두각시처럼 저당 잡힌 삶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 채.
‘오늘 몇 시에 만날래?’
“이 사람 출근하고 나면.”
처음에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어도 1박 2일 정도 여유를 두고 과거의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점점 대담해지고, 아예 신혼집에 그녀를 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난 그런 거 신경 안 써.’
‘과거의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상어이빨처럼 위험한 발상.
처음부터 했던 말. 이제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달리게 되는 폭발력.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오는 방전.
그녀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의 일탈은, 어쩌면 바람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대담한 무신경. 타인에 대한 무신경은 곧 기만이 된다.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자?”
“어, 좀 피곤해서.”
바람을 피우고 온 날이면 나는 항상 자리를 피했다. 그녀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빛의 깜빡임처럼 보였다. 하지만 변함없는 두려울 정도의 밝음. 차별이 없는 광도와 휘도.
그렇게 나는 빛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아니, 올라탈 수 있다고 믿었다.
자기기만은 자신에 대한 과신이 되었고, 양심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왜 감기에 걸렸어?”
“친구랑 밤새 놀아서 그래.”
1박 2일로 밤새도록 그녀와 만나고 왔을 때조차, 나를 걱정해 주는 말에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인간의 껍질을 벗기는 악마의 칼처럼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두운 사람일 뿐 악마는 되지 못했다.
악마의 디테일이 없던 나는, 수십 번의 바람의 끝에 결국 빛의 창에 심장을 뚫리고 만다.
“기준. 기억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