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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넷, 그림자 잘라내기.

by 송대근
“청년은, 이 섬 이름을 알고 있는가?”


택시를 타고 모교를 가고 있던 중이었다. 부산 영도라는 작은 섬. 다음 날 오전부터 일정이 있기에 하루를 묵을 생각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도착했다. 안개로 번진 오렌지빛의 바다는 마치 상어에 물린 상처에서 번져 나오는 피처럼 기묘하고 낯선 빛을 내고 있었다.


“알죠. 영도잖아요.”

“그건 요즘 부르는 이름이고. 옛날에는 절영도라고 불렀다네.”


오디오 소리를 뚫고 택시 기사의 낡고 샛된 목소리가 기이하게도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무심코 신경을 곤두세웠다.


“절영도요?”

“그래. 끊을 절(絶)에, 그림자 영(影). 그림자가 끊어지는 섬이라고 불렀지.”


내 몸에 달라붙어, 나를 떠난 적 없는 중독의 그림자. 그리고 그림자를 끊어내는 섬.

황혼의 빛이 섬을 짙게 비추었지만, 그림자는 바다 어디에도 비치지 않았다. 섬 주변을 둘러싼 깎아지른 절벽과 빛을 방해하는 안개가 그 모든 것을 영원히 단절시킨 듯했다. 나는 그 절경 속에서 낯선 구원의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이름을 바꾼 이유가 뭘까요?”

“글쎄. 말이 너무 강해서 바꿨다나 봐. 뭘 끊는다는 게 어감이 좀 안 좋지. 그래서 요즘은 그냥 영도지.”


시답잖은 이야기로 끝난 대화였지만 내게는 운명의 틈새를 보여주는 힌트처럼 느껴졌다.

택시에서 내려, 바닷바람을 맞는다.

불쾌하게 들어붙 비린내. 그리고 그 뒤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절경이네, 한잔 하기 딱 좋은 분위기지?’

그림자의 목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다. ‘그녀’로 인식했던, 속삭이는 존재. 이제 그 정체를 똑바로 직시한다. 그것은 나에게 딸린 그림자였다.


“... 너도 그림자라서 끊어지지 않는 거냐?”

‘당연하지. 나와 너는 떼어놓을 수 없어. 네가 미로 속에서 얻었던 그 안락함. 네 아내와 쓴 그 유서 같은 계약서. 네가 가장 자유로워지는 순간은 결국 무너지는 순간이라는 걸 잊지 마.’


거칠지만 진실된 말. 그리고 그 말은 스스로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태양은 겨울바다 뒤로 빠르게 숨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명암은 인위적인 마스카라처럼 더욱 짙어진다.

어둠에 삼켜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내는 빛이 떠올랐다.

사회, 친구, 가족들의 기쁨과 평화. 그들이 지배한 ‘한 잔’의 여유는 내게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자,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잔인한 조롱이었다.


“맞아. 평범한 사람들. 그 빛을 보면 내 그림자는 더더욱 짙어져.”

‘그래 그러니까 그런 빛은 멀리해. 그 사람들은 널 이해 못 해. 네가 얼마나 초라한지, 얼마나 용기가 부족한지 드러날 뿐이야.’


비참해지지 말자.

그렇게 나 자신을 숨길 수 있는 포근한 어둠을 택했다. 미로 속의 유리파편을 나를 보호하기 위한 변명으로 벼르고, 순간의 도망. 하지만 그 어둠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내가 밝은 곳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림자는 더 길어지고 갈증은 타올랐다. 중독되지 않은 그들의 세상에 들어가려 발버둥 칠수록, 나는 더 깊은 어둠의 자석에 끌려갔다.


“그래. 난 빛을 멀리 할 거야. 난 그렇게 될 수가 없어.”


그들은 날 이해하지 못한다.

당연하다. 그들과 난 다르다.

그래서 난 더더욱 어두운 사람들. 중독의 고통을 공감하는 세상으로 뛰어들었다.

매주 휘갈기는 문장. 그곳에는 계약서보다 더 무거운 고통과 독백의 배설물이 쌓여있었다. 가볍고도 솔직한 절망과 권태를 김장독처럼 품고 있었다. 나는 술 대신 고통의 언어를 숙성시켰다.

‘오늘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문장을 힘없이 고백하는 것으로 끈질긴 갈증을 잊는 듯 보였다.


‘그래. 빛을 멀리해. 그걸로 편해질 수 있지. 너도 이제 네 자리를 찾았어.’

“그래도, 술은 안 마셔.”

나는 툭 대답했다.


해가 완전히 졌다. 칠흑의 장막으로 감싸인 바다. 이 완벽한 어둠은 섬의 모든 그림자를 삼켜버렸다.

태양은 그림자를 끊어낼 뿐이었지만, 어둠은 그림자를 지워버렸다.

바닷바람이 이마를 매섭게 때린다.

그럼에도 나를 짓누르던 그림자, 그 내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나는 나를 알아. 중독에 취약하지. 유혹이 언제 갑자기 찾아올지도 몰라. 그런데도.”

깊은 한숨.

“그런데도 난 술은 안 마셔. 건강 때문도 아니고 이혼하기 싫어서도 아니야.”


회사가 싫어도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토록 증오하는 가족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때론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사람도 있다.

회피와 직면, 지난날의 끈적한 싸움과 공존 끝에 얻은 사실은 하나.


모든 감정 소모가 중독의 존재를 불 지피는 연료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를, 그림자를, 중독을 꺼트리면 꺼트릴수록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끊어낸다는 인식 자체가 그녀의 존재를 되살렸고, 다시 그녀를 찾게 되는 무한의 굴레가 되었다.

그것은 제 꼬리를 삼키며 자라나는 뱀. 우로보로스였다. 끊어내려 할수록 더욱 단단하게 조여 오는, 무한한 반복회로.


“그냥, 네가 지겨워졌어.”


그 문장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십여 년간 내 머릿속에 채워져 있던 묵직한 자물쇠가 '틱' 하고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비장한 결심도, 떨리는 두려움도 아니었다. 그저 지루함과 권태.

사랑에 빠지는 데 이유가 없다면, 그 사랑이 식는 데도 이유는 필요 없다.


그림자를 없애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본체를 없애거나, 빛을 없애거나.

그림자를 이기기 위해 빛을 쫓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 존재에 대한 인식을 잘라내는 것.

아얘 지우는 것.


“애초에 넌 혼자서는 존재할 수도 없잖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칠흑이 된 어둠 속의 바다. 이제 이곳엔 어떤 그림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다.



그녀의, 아니, 그림자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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