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는 이가 편한 음식이 아닌, 먹는 이를 배려한 음식을 만듭니다.
30년 요리 열정, 남도 명인을 만들다.
온난한 기후와 드넓은 평야, 두 면이 바다인 천혜의 환경을 품은 남도는 예로부터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발전시켜온 지역이다. 신선한 해산물과 풍족한 제철 재료를 섬세한 조리법으로 연출해 내는 ‘남도음식’ 은 한국의 여러 지역 음식 중에서도 특별한 위상을 가진다. 바다를 면한 지역의 신선한 해산물 음식, 내륙 지역의 정갈하고 맛깔스러운 한정식, 양념을 듬뿍 쓴 각종 반찬이 한 상 가득 차려진 남도의 밥상은, 단순한 향토음식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한식의 한 장르로, 그 이름만으로 미각세포를 깨우고 풍요로움을 전하는 힘이 있다.
한국의 지역음식은 각 지역 음식문화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유산이다. 그러나 관련 문헌이나 자료가 거의 없고, 가정마다 조리법에 차이가 커서 표준화된 조리법을 제시하기가 매우 어렵다.따라서 지역음식의 기록과 보존은 사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역 음식 명인 지정이 필요한 이유다. 이에 전라남도는 지난 2013년부터 남도 전통음식의 보존과 솜씨 계승을 위해 ‘남도음식명인’을 선정해 지원하고 있다.
남도음식명인의 자격요건은 까다롭다. 5년 이상 전남 거주자 가운데 남도음식경영대회 5회 이상 참가, 남도음식문화큰잔치 전시•경영 분야 대상 또는 최우수상을 2회 이상 수상한 도민이 대상이다. 2017년 이래 9인의 명인 선정상황을 유지해오다가 2023년 4명을 추가 선정했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여수의 정선심 명인(71세), 선심전통식품 대표이다.
“8년을 기다렸어요. ‘남도움식 명인’은 단순히 음식만을 잘한다고 해서, 상을 많이 탔다 해서 명인이 되지는 않아요. 엄청 어렵고 힘들어요. 외지에서 볼 때는 조금 가볍게 생각하는지 몰라도요.”
지난 30여 년간 여수에서 남도의례음식을 만들어온 그에게 남도 명인의 위상에 대해 물어보니 대단한 자부심을 담아 소감을 전했다.
명인은 어려서부터 유독 음식만들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과자가 귀하던 시절 외할머니가 한과를 만드시는 걸 지켜보면서, 어린 마음에도 ‘언젠가는 꼭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했다고 기억한다. 이런 명인의 바람은 결혼 이후에 이루어졌다. 명인은 결혼 후, 시댁의 당숙모님들에게 본격적으로 의례음식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바지 음식을 하는 지인의 가게에서 허드렛 일을 하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픈 남편을 돌보며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도 아이를 업고 다니며 어깨너머로 꼬박 3년을 배웠다. 이후로도 의례음식에 관한 기술을 배울 수만 있다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서 배웠다. 새로운 음식을 배우면 항상 집으로 돌아와 여러번 반복해서 기술을 익히고, 거기에 본인의 아이디어를 더해 자신만의 레시피를 완성해 나갔다. 그렇게 간판도 없이 작게 시작한 일은, 알음알음으로 입소문을 타게 되었다. 그리고 몇년 뒤, 한달에 며칠씩 밤샘 작업을 해야할 정도로 주문이 밀려들었다.
처음에는 아파트 상가에 가게를 열고 이바지 한과를 판매했는데, 주민들의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밀려들자 2012년 여수시 서 시장 인근에 ‘선심식품’이라는 상호를 내고 본격적인 한과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점차 한과를 찾는 수요의 한계를 느끼면서 여수 지역 향토음식을 지속 생산하고자 전통 식품사업에 뛰어들었다. 여수의례음식과 더불어 여수의 대표 작물인 돌산 갓을 이용한 갓김치와 간장게장, 새우장을 제조,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소한의 양념을 고집해 재료 본연의 맛을 제대로 살린 갓김치, 직접 담근 조선간장으로 담근 간장게장, 새우장은 그 맛을 인정받으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한편, 명인은 사업을 확장하는 도중에도 배움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여수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여수농업인생활대학’에서 농산물 가공반을 전공했고, 이를 통해 여수 농산물을 활용한 요리를 연구•개발하는 과정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명인의 문어포를 이용한 천연조미료 개발과 같은 다양한 가공법을 익히기도 했다. 지역 전통음식을 보존하고 유지, 계승하고자 하는 끝없는 노력은 결국 2023년 남도음식 면인 선정으로 이어졌다.
음식 맛의 비결은 기본 원칙을 꾸준히 지키는 것
“(손님이 오면) 저를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하고 물어봐요. 그럼 ‘이번에 딸을 여의는데 음식을 어디서 하지’ 하고 걱정했더니 누가 나를 추천해 주더래요. 그렇게 해서 오신 분들이 많아요. 힘이 들어도 내 음식이 밖에 나가면 이렇게 칭찬을 받는구나, 사람들한테 믿음을 주는구나 생각하면 기쁘지요.”
명인은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되고 행복한 순간이라고 한다. 이야기하는 내내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에게 ‘신뢰’는. 한달에 며칠씩 밤샘을 할 정도로 고된 일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명인은 음식을 미리 만들어 두는 법이 없다. 새벽에 나가야 하는 음식이면 밤을 새워서라도 손님에게 전달하기 직전에 완성되도록 시간을 맞춘다. 미리 만들어 둔 음식은 맛이 떨어지기 마련이기에 항상 갓 만든 음식을 손님에게 드린다. 명인의 음식은 만드는 이가 편한 음식이 아닌 먹는 이를 배려한 음식이다.
명인의 하루는 매일 아침 6시 전에 일어나 인근에 있는 여수 서 시장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된다.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음식에 쓰이는 재료를 직접 눈으로 보고 선택하는 것이 원칙이기도 하다. 전국으로 좋은 재료를 찾아다니기도 하지만 거래처 역시 최상품의 재료가 들어오면 그에게 먼저 연락을 해온다고 한다. 20년 이상 거래처를 바꾸지도 않고 값도 깍은 적이 없는 최우수 고객이기 때문이다. 제철 재료는 최적의 시기에 가장 좋은 것들로 구해서 보관해 두고 사용한다. 명인의 음식 비법이 무엇인지 물으니, ‘이러한 단순한 원칙을 꾸준히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조금 뻔한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묵직했다. 느긋하면서 자신을 꾸밀 줄 모르는 성품이 고스란히 음식에 담겨있는 듯 했다.
명인의 맛, 여수 정통 의례음식
사람은 태어나서 혼인하고, 죽고, 제사를 받아먹는다. 한국인들은 삶의 중요한 기점마다 이를 기념하는 통과의례를 중시했다. 한국사회에서는 음식을 매개하지 않은 통과의례를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의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독특한 음식문화가 유난히 발달했다.
의례의 형식은 전국적으로 유사하지만, 음식은 그렇지 않다. 특히, 남도의례음식은 솜씨의 미학이 가지는 품격이 뛰어나며 향토색이 짙다. 남도의례음식은 음식의 가짓수와 맛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같은 남도 지역 내에서도 지역별로 음식의 종류와 맛에 차이가 크다고 한다. 그러나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은 실정이다. 안동 쪽 종가나 조선시대 궁중음식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만, 2012년 출간된 남도의례음식 상차림 관련 서적에서도 지역별 특색에 대한 내용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남도의례음식은 투박해도 신선하고 맛있는게 중요해요. 특히, 여수의례음식은 해물 종류가 올라가야 돼요. 신선한 해물로만 상을 차리면 ‘아주 잘 차렸다고 해요’. 또 마른 음식보다는 진 음식이 많고, 맛은 좀 강해요. 아마 바닷가에 살아서 그런가 짠 기가 강하죠.”
여수는 반도 지형으로 삼면을 둘러싼 청정해역에서 다양한 해산물을 얻을 수 있다. 여수가 품고 있는 여천평야에서는 쌀을 비롯한 여러 곡식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또 울창한 산림지역에서는 각종 산채가 자란다. 음식문화가 발달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고루 갖춘 셈이다.
그중에서도 해산물 음식은 여수 의례음식의 주연(主演)이다. 이번 취재에, 명인이 선보인 음식은 ‘문어오림’, ‘문어 강정’, ‘바지락 꼬지’와 ‘금풍생이 구이’로 모두 해산물을 사용해 만든 대표적인 여수의례음식이다. 명인에 따르면, 여수에서는 의례상에 문어와 바지락 꼬지가 오르지 않으면, 잘 차린 상으로 쳐주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바지락 꼬지는 여수의 대표 향토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바지락의 살을 꼬지에 하나하나 꿰어 바닷바람에 말린다. 말린 바지락을 찜통에 살짝 쪄서 부드럽게 만든 다음, 간장 양념장에 졸인다. 이렇게 만든 ‘바지락 꼬지’는 쫄깃한 식감과 달콤 짭짤한 맛이 묘하게 이국적이면서도 전통적이다.
‘군평선이’ 혹은 ‘꽃돔’이라고도 불리는 ‘금풍생이’는 식감은 부드럽고, 맛은 담백하면서도 동시에 진한 감칠맛이 느껴지는 생선이다. 야사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에게 이 생선을 요리해 대접한 관기의 이름인 ‘평선이’를 따 군평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 남편에게는 아까워서 주지 않고 샛서방에게만 몰래 준다고 해서 ‘샛서방 고기’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도 최고로 꼽은 이 생선은 여수에서는 굴비보다 귀한 대접을 받는데, 특히 남도의 다른 지역에서 의례상에 올리는 생선찜 대신, 여수에서는 금풍생이 구이를 올린다고 한다.
‘문어 강정’은 여수 의례음식인 ‘피문어찜’을 명인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여수 지방의 고급 문어 요리인 ‘피문어찜’은 살아있는 문어를 깨끗이 손질해, 미지근한 물에 2시간 정도 불린 뒤, 양념장에 하룻밤 재웠다가 쪄낸 것이다. 이 ‘피문어찜’을 기반으로 명인이 만든 문어 강정은 데친 문어를 바람에 살짝 말려, 양념장에 졸여낸 것이다. 이렇게 하면 문어의 살 깊숙이 간간한 양념이 잘 배어드는데 명인만의 비법이라고 한다.
문어는 예부터 제사나 잔치에 중요하게 쓰였다. 특히 혼례나 제례, 회갑연 등 다양한 의례에서 큰상에 웃기로 ‘문어오림’을 올렸다. 모양은 꽃부터, 나뭇잎, 나비, 새, 공작, 봉황까지 굉장히 다양한데, 모두 축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문어 한 마리를 오리는데 꼬박 사흘이 걸린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시간과 기술력이 요구되는 ‘문어오림’은 남도 지역 의례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남도의례음식 중 해산물•포 분야의 명인이 만든 문어강정 및 문어포는 그 명성이 자자해 폐백이나 이바지를 위한 음식으로 다른 지방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향토음식계승을 위한 교육에 매진할 때
돈보다는 아직도 공부가 더 목마르다는 명인은, 남도음식명인 선정 이후 겹치기를 할 정도로 밀려들던 주문량을 한달에 서너번으로 줄이고 기술개발과 전수교육에 힘쓰고 있다. 이러한 소신은 한식관련 인문서적들이 빼곡히 꽂혀 있던 명인의 소박한 책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근 그의 관심사는 지역의 농산물을 상품화하고 여수 향토음식을 타 지역에 알리기 위해 자신이 30 여년 간 연마한 기술을 나누는 일이다. 이를 위해 농기술선센터 등에서 여성 농업인 대상 강의를 하며 농산물 상품화를 통해 판매활로를 찾도록 돕고, 일반인에게는 조리법이나 조리기술의 전달 대신 바른 먹거리에 대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명인에게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지 물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여수 의례음식 체험관을 열고 싶어요. 여수에 온 관광객들이 여수의례음식을 먹어 보고, 배우고, 또, 직접 만든 음식을 집에 가져가고 하는 여수에 여행 와서 지역전통음식을 체험한 뒤 푸짐하게 챙겨가는 문화체험 공간을 만들고자 합니다”
명인의 꿈이 이뤄진다면, 여수 의례음식은 한국을 대표하는 향토음식으로, 또, 여수의 전통문화로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이 남도의례음식의 매력에 주목하고, 남도음식문화의 무한한 가능성이 국내외로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이범준 교수
(본 내용은 "내일신문 혼을 담은 남도음식명인 열전"에 편집되어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