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반가음식 50년 지기
남도 반가음식 명인, 천수봉 남도음식명인 전수관 요리 연구소 대표
남도 반가음식의 대가, 천수봉 명인
“예부터 우리나라에서 나주, 전주, 개성을 빼고는 음식을 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세 지역이 한식의 성지죠. 제가 50년생인데 개성에서 태어났어요.
한국전쟁으로 태어나자마자 업혀서 나주로 피난을 왔어요.
분단이 되면서 돌아가지 못했죠.”
남도 반가음식의 대가, 천수봉 명인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명인에 대해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자기소개였다. ‘전라도’라는 이름은 ‘전주’와 ‘나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나주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전라도 남부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런 덕에 나주 음식은 남도를 대표하는 음식이었다. 개성은 원래 음식으로 이름난 곳이다. 과거 고려 시대의 수도로 오랜 시간 동안 교통의 요지였으며, 풍부한 식재료와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눈부신 식문화를 꽃피웠기 때문이다. 나주는 친정어머니의 고향이다. 개성으로 시집을 간 어머니의 음식은 개성 음식과 나주 음식을 접목한 음식이었다. 한국 음식 문화의 명문인 두 고장의 음식은 고스란히 명인에게 이어졌다.
천수봉 명인은 제1호 남도음식 명인이다. 전업으로 음식의 길을 선택한 지 18년 만인 2013년에 명인으로 선정되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친척의 축의금을 걱정하시던 시어머니의 시름을 덜고자 갓 시집온 새색시가 폐백 음식을 만들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렇게 어느덧 업력이 50년이 흘렀다. 명인은 23년간 국회의원 지역구 사무실에서 보좌관 생활도 했다. 이후 미식 관광을 유치해 나주시 발전에 일조하고자 나주 음식의 특색을 살린 남도 한정식 전문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명인은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전남대 평생교육원에서 전통음식 및 폐백 이바지 음식 과정을 수료했다. 또한, 주말과 여름휴가를 서울의 궁중음식연구원 및 국내 최고의 한식 권위자들에게 음식을 배우는데 모두 바쳤다. 한정식 식당을 운영하던 시절에도 전국에 음식으로 이름난 종가를 찾아다니며 부족한 음식 공부를 채워 나갔다. 이러한 혼신의 노력이 오늘의 ‘남도 반가음식의 대가’, 천수봉 명인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정성과 예의를 중시하는 남도 반가음식의 맛을 구현
남도의 중심지였던 나주에는 유독 양반가가 많았다. 반가음식은 조선시대 사대부 혹은 양반 계층의 식문화와 그들이 상용했던 음식이다. 검박하되 정성과 예의를 중시하며, 시원하고 담백한 맛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남도의 반가음식은 풍부한 곡식과 해산물, 산채 등 식재료가 풍부한 전라도 지역의 부유한 토반들을 중심으로 대를 이어 내려왔다.
명인의 외가는 조선 전기 영의정을 지낸 신숙주의 집안으로, 나주의 이름난 부농이었다. 나주 전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한 달에도 수차례 크고 작은 집안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음식 솜씨는 먹어 본 경험이 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라고 명인은 말했다. 집안의 대소사 때마다 외할머니께서 대청마루에 앉아 손녀들을 모아놓고 하셨던 음식 교육이 자신의 스승이었다.
본디 음식문화는 계급과 서열을 드러낸다. 故 이어령 선생은 반가음식과 상민음식의 차이는 음식 정신에 있다고 했다. 그는 반가음식의 진수는 음식을 만들 때 진심을 담아 조심스럽게 정성을 다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지적했다. 명인 또한 음식을 만들 때 최우선 덕목은 ‘만드는 이의 정갈한 마음가짐’이라고 답했다. 그는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을 때는 우리 몸에서 좋지 않은 에너지가 발산되고 그 파장으로 제대로 된 손맛이 발휘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미각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정확한 맛의 평가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런 때에는 같은 조리법으로 만들어도 기대했던 맛이 구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다.
명인은 지금의 한식이 뿌리를 잊은 채 곁가지처럼 산만하게 변해가는 현실을 많이 아쉬워했다. 그는 어떤 음식이든 원형과 근본을 제대로 알고 나서야 진일보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도음식의 발전을 위해서 사라져 가는 남도 반가음식을 복원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의견을 더했다.
음식에 대한 배움을 나누며 봉사를 실천하는 삶
사업체를 정리한 후 명인은 남도음식 강의 및 메뉴개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강의 대상도 전국 각지의 농업기술센터부터 전남 지역 고등학교까지 다양하다. 강의 내용도 남도음식 조리, 남도음식 인문학 및 한식 조리 분야 진로상담까지 폭넓다.
명인은 고객으로 인연을 맺었던 농촌진흥청장님의 추천으로 전국 음식점 대상 전통 음식 조리 컨설팅을 해주는 ‘농가 맛집’ 사업에 참여했다. 전국 총 9개의 업체에 대한 컨설팅을 수행했는데 이를 계기로 전국의 농어촌 기술센터에 명인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강의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최근 명인은 장류 및 장아찌 등 전통식품 개발 컨설팅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명인은 각고의 노력을 탄생한 제품에 대한 특허출원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음식 공부를 통해 얻은 지식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남도음식 명인의 소명이고, 한식 발전에 일조하는 길이라는 소신 때문이다.
그간 명인에게 음식 교육을 받은 수강생이 백여 명이 넘는다. 명인은 제자들과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며, 그간 자신이 개발한 신메뉴 교육을 하고 있다. 또한 불자인 명인은 제자들과 함께 전국 사찰들을 돌며 음식 봉사활동도 다닌다. 명인은 앞으로도 자신이 개발한 메뉴나 기술을 지키는데 연연하지 않고 나눌 수 있는 것은 나누며 사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나주와 개성의 맛이 아름답게 공존하는 명인의 음식
음식은 개인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의 산물이다. 명인은 개성에서 태어났지만 평생을 나주에서 살았다. 그렇기에 명인의 음식에는 두 지역의 맛이 아름답게 어울려 공존한다.
홍어는 남도의 잔칫상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으로 ‘남도의 맛’ 이라고들 한다.
"나주와 가까운 고을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데,
보통 사람들과는 기호가 같지 않다."
이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나오는 홍어에 대한 설명이다. 고려말부터 600년 이상 나주 영산포는 ‘삭힌 홍어’의 본고장이다. 이 유래는 고려 공민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왜구의 출몰이 잦아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흑산도와 인근 영산도 주민들을 전남의 중심인 나주 영산포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 이주민들은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해 홍어를 이주지로 운반해 왔다. 돛단배로 열흘 이상이 걸리는 흑산도에서 영산포까지의 뱃길에서 홍어는 자연발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차마 아까워 버리지 못해 삭힌 홍어를 먹은 사람들에게 탈이 나지 않자, 그때부터 나주에서 삭힌 홍어를 먹게 된 것이다.
명인은 취재를 위해 홍어 요리인 ‘홍어삼합’과 ‘홍어포’를 선보였다. ‘삼합’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재료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새로운 맛을 내는 음식을 이야기한다. 본래 명리학 용어다. 명인은 “홍어삼합은 먹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탄생한 음식”이라고 했다. 삭힌 홍어의 암모니아로 인한 자극적인 맛을 지방과 단백질이 풍부한 돼지고기가 중화시키고 또 다른 발효음식인 김치가 소화를 돕는다는 것이다.
‘홍어포’는 전통 어포를 명인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어포는 오래전 해산물을 햇볕에 말려 저장해 두고 먹은 것으로 생선을 얇게 저며 양념하여 말려서 만든다. 명인은 홍어를 쪄서 조청을 넣은 간장 양념장에 조린 후 건조해 홍어포를 만들었다. 쫀득한 식감과 삭힌 홍어 특유의 톡 쏘는 맛이 줄어들어 입문자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명인은 여기에 꽃 모양으로 하얗게 건조된 배를 곁들여 은은한 달콤함을 더했다.
‘삭힌 홍어’는 이제는 더 이상 남도 사람들 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도시화에 따른 매식 문화가 특정 지역의 향토 음식을 다른 지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한 탓이다. 그러나 혀를 톡 쏠만큼 도전적으로 익어 간 ‘삭힌 홍어’는 남도 사람들의 정체성 위에 찍힌 문양 같은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지호롱은 낙지를 통째로 대나무 젓가락이나 볏짚에 말아 양념장을 발라 굽거나 쪄서 만든 남도 향토음식이다. 남도의 제사상 혹은 잔칫상에 오르는 귀한 음식음식이다. 명인은 제사상에 올라가는 낙지 호롱은 실고추 같은 고명이나 양념을 하지 않고, 잔칫상에 내는 낙지호롱에는 실고추, 깨와 파 등 갖가지 고명을 올리는 것이 남도 반가의 법도라고 귀띔했다. 명인의 낙지호롱은 짚에 말아 과한 양념 없이 쪄서 만들었는데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통배 백김치’는 명인의 어머니가 개성 시댁에서 배운 김치를 명인에게 전수한 집안의 음식이다. 명인은 통배 백김치가 사찰 요리로 알려져 있으나 이북식 김치라고 주장했다. 마침 나주의 특산물이 배인 관계로 명인의 시그니쳐 메뉴가 되었다. 손님 상에 올리는 귀한 김치로 먹기 직전에 껍질을 벗긴 후 조각을 내서 상에 올린다. 달콤한 배의 과육, 시원한 백김치와 쨍한 김치국물이 어우러진 맛에 약간의 전율이 일었다. 전형적인 남도김치와는 차별화된 명인 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묻어났다.
한식이 가진 독특한 맛과 건강 기능성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식과 더불어 남도음식이 세계화되기 위해서는 맛과 영양가의 우수성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남도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정체성을 담은 남도음식의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인터뷰를 마치며 남도음식 명인들의 삶과 그들의 역사가 담긴 음식이 남도음식 이야기의 독특한 소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범준
제주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교수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