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음식명인, 김정숙 발효누리 대표
취재를 다니며 남도음식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유독 막걸리 식초에 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남도의 보물 같은 식재료들이 가진 본연의 맛을 단숨에 비약시키는 막걸리 식초의 마법! 양조식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동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남도에서 식초는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약이었다. 특히 남도 해안가에서는 여름 해산물의 식중독 위험이 커 방부, 해독, 살균의 효능을 가진 식초의 쓰임새가 무궁무진했다. 그러다 보니, 남도의 옛 어머니들은 늘 부뚜막 위에 초두루미를 두고 막걸리를 부어가며 식초를 직접 발효시켰다. 이렇게 만든 전통발효식초는 남도음식의 풍미를 내는 중요한 조미료로 사용되어왔다. 이러한 남도 전통발효식초의 명맥을 잇기 위해, 전남도는 지난 2023년, 전통발효식초 분야 남도음식명인을 신규 지정하였다.
여름은 식초를 빚기에 좋은 계절이다. 대개 6월부터 8월까지 한여름 석 달 간 일년 먹을 식초를 빚는다. 반가운 마음에 차를 달렸다. 명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기막히게 아름다웠다. 남해 득량만의 너른 바다가 한눈에 펼쳐지고, 백사장 주변 소나무 숲이 울창한 해안가 언덕에 위치한 ‘정남진 발효누리’, 이곳은 인터뷰의 주인공 김정숙 명인의 일터이자 쉼터다.
“식초를 천사의 눈물이라고 한다네요?”
눈에 띄게 맑은 인상의 명인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을 건넸다. 식초의 유래는 기원전 5천년 경, 고대 바빌로니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지만 ‘식초’라는 용어가 등장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구약성서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부른 이름이다. 필자가 식초에 관한 문헌을 보고 취재한 결과로는 명인이 말한 문구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아들을 카톨릭 사제로 키워낸 명인이 가진 발효식초에 대한 신념을 대변하는 표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간의 세월이 고생스럽지 않았을 리 없었을 텐데도 명인의 얼굴에는 여유와 평화가 넘쳤다. 이런 품성으로 빚어낸 명인의 식초는 과연 어떤 맛일지 맛보기 전부터 설렜다.
명인이 따라 준 식초를 맛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순정(純正)’이었다. 묵직한 산미는 꼬인 데가 없는 직구 같은 맛이었다. 좋은 음식은 가장 본질적인 맛을 낸다. 이 맛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러나 맛의 비결을 알아보기 전에 우선, 이 맛을 만들어 내기까지의 명인의 인생 여정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명인은 손맛 좋은 어머니로부터 일찍부터 솜씨를 대물림 받았다. 결혼 후 음식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이어가고 싶던 차에 지인을 따라 전통조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명인의 음식 사진을 보고 전국 각지에서 강습 요청이 쇄도했다. 비행기를 타고 명인이 살고 있는 광주까지 찾아오는 수강생들도 생겨났다. 이후 명인은 2년 넘게 공부했던 한국전통음식연구소의 강단에도 서게 되었고, 전남대 평생교육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농업기술센터에서 러브콜을 받는 전통조리 분야의 스타강사가 되었다.
“다양한 전통조리 강의를 하면서도 ‘한 길을 가야 되는데…’ 라고 늘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에 전통발효식초를 만났어요. 이걸 파보자 했죠. 발효는 과학적인 근거가 없이는 제대로 만들 수 없고, 정직하게 결과물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 점이 너무 좋았어요.”
그때부터 명인은 전통발효식초 제조기술을 배우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전통발효식초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정립된 제조과정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무엇을 하든 근본부터 파고드는 집요함으로 명인은 광주 소재 한 대학의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했다. 어렵게 만난 전통발효식초를 결코 뜬구름 잡듯이 배우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방송통신대학을 거쳐 영양사 자격증 취득을 하고 이어서 ‘약선요리’ 석사학위까지 마쳤다. 그야말로 ‘미치도록’ 공부했던 시간이었다. 명인은 너무나도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정숙 명인과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명인이 남도음식의 전통을 지켜가는 전통요리 연구가인 동시에 스마트한 과학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이 시대에 걸맞는 전통음식명인이 아닌가! 남도음식의 미래를 발견한 것 같았다.
공부를 마친 명인은 남편의 고향인 장흥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자신이 정립한 방식대로 전통발효식초를 빚기 시작했다.
“어떤 식초를 빚을 것인지를 깊이 고민했어요. 그러다 어릴 적 외할머니가 부뚜막 위에서 막걸리 식초를 만드시던 게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래, 곡물로 식초를 만들자!”
인체에 가장 이롭다는 곡물인 현미를 선택했다. 그 중에서도 친환경 우렁이 농법으로 지은 쌀을 엄선하고 정확하게 겉껍질만 벗겨 현미로 도정해 식초를 빚었다. 초창기에는 항아리 열 개에 식초를 빚어 절반 가까이를 그대로 엎어 버리는 일이 허다했다. 이를 지켜보던 남편의 원성을 사는 일도 많았다. 명인의 흑초가 자아내던 깊은 풍미의 비결은 바로 이 셀 수 없는 시행착오와 연습, 수정과 폐기, 재도전을 통해 얻어낸 값진 결과물이었다.
식초를 빚는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깊은 맛과 향을 내고 이로운 성분들만 남기기 위해서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통발효식초는 양산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가격대도 다소 높을 수밖에 없다. 명인이 만든 현미흑초의 가격은 3만원 선(375ml)이다. 이런 이유로 명인은 많은 사람들이 가정에서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부뚜막 식초' 무료강좌를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그는 조상들의 부뚜막 식초 문화를 전파해 집집마다 직접 빚은 식초로 가족의 건강을 챙기는 날을 꿈꾼다고 했다.
“수업을 하다 보면 집에서 식초를 만들었는데 실패했다는 분들을 많이 만나요. 어떻게 하면 식초를 쉽게 만들게 할 수 있을까? 오랜 기도 끝에 영감을 받았죠.”
곡물발효식초는 곡물을 알코올 발효시켜 술로 만들고, 다시 이 술을 초산균의 먹이로 발효시켜 식초로 만든 것이다. 알코올 발효와 초산발효의 두 단계를 거치기에 상대적으로 제조가 까다롭다. 좋은 식초를 빚으려면 좋은 술이 있어야 하고, 좋은 술을 빚으려면 좋은 누룩과 쌀이 필요하다. 명인은 물만 부으면 바로 식초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고두밥과 누룩을 혼합해 전처리를 한 천연발효누룩 ‘초씨’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전라남도 농업 기술원의 권유로 특허 출원까지 마쳤다.
필자에게 명인이 가장 먼저 선보인 음식은 장흥 앞바다에서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에 다양한 채소를 곁들여 만든 물회였다. 물회는 본디, 식초의 맛이 좌우한다. 바닷가에 자리한 식초의 명가에서 만들어낸 남도의 물회! 그 맛의 위력이 감히 어떨지는 독자 여러분들의 상상에 맡긴다.
명인이 직접 개발한 조리법으로 만들었다는 현미 식초 방울토마토 초절임과 오이피클 냉국도 상에 올랐다. 현미 식초는 다른 식초에 비해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면서도 다른 재료와 맛이 잘 화합된다. 세 음식에 모두 같은 종류의 현미 식초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각기 다른 원재료의 맛과 영양이 부드러운 산미와 어우러져 맛의 고유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명인의 식초밥상은 영양과잉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여름 보양식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명인은 지역의 특산물을 활용한 전통발효식초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약리 효능이 우수한 상황버섯이나 천년의 역사를 가진 토종쌀인 고대미 등을 활용해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주로 항암치료를 하는 암환자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쌀을 구입해서 누룩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해서 식초가 완성되기까지 모든 과정에 정성을 기울여야 우리 몸에 이로운 식초가 됩니다. ‘진짜’ 식초를 만들어서 자라나는 후손들도 맛 볼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발효’가 한국인의 문화코드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남도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로운 발효지식이 가장 잘 보존된 지역이다. 발효음식은 남도음식이 세계화를 위해 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분야다. 그러나 전통발효식초는 발효음식 분야에서 소외된 경향이 있었다. 남도발효음식의 세계화 및 산업화를 위해 우리가 발효식초의 전통성을 역사적으로 되짚고, 가치 입증 및 창출을 해야하는 이유다.
해당 글은 내일신문 "혼을 담는 남도음식명인" 칼럼에 편집되어 게재되었습니다.
이범준
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교수
미식유산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