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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istine in island Oct 18. 2024

남도의 장으로 한식의 품격을 말하다.

대한민국 식품명인 35호 기순도

장(裝)을 만들며 세상을 이끌고 있는 명인 기순도

지난 1년간 17개국에서 탄생한 24명의 미슐랭 스타 셰프가 앞다투어 한국의 발효음식을 탐구하기 위해 찾은 곳이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창천면에 위치한 양진재 종가의 장고(裝庫)다. 셰프들은 이곳에서 직접 장을 담그며 한식 전통 장(醬) 담그기를 배우고 익혔다. 담근 장은 각 셰프들의 이름표를 단 항아리에서 숙성되어, 세계 각국에 있는 셰프들의 레스토랑으로 공수돼 메뉴에 활용되고 있다.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뉴욕 ‘르 베르나댕(Le Bernardin)’의 에릭 리퍼트(Eric Ripert) 셰프와 덴마크 ‘노마(Noma)’의 르네 레드제피(Rene Redzepi) 셰프도 이곳의 장맛에 일찍이 찬사를 보낸 바 있다. 2019년, 종가의 장은 전 세계 식품 트렌드를 이끄는 프랑스 파리 르봉마르셰 백화점 식품관에 입점했으며, 이를 시작으로 미국의 아마존 및 일본의 큐텐재팬 등 해외 유수의 온 오프라인 매장까지 수출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2017년에는 트럼프 대통령 방한 만찬 메뉴에 360년 역사의 내림 씨 간장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주목을 받았으며, 이어 미국 백악관 만찬에 딸기 고추장이 사용되며 전 세계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와 같은 양진재 종가의 장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과 인정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 장고에는 한평생 지켜온 남도의 장맛으로 세계적인 셰프들을 한자리로 불러 모으고, 전 세계 미식의 중심에서 한식의 위상을 눈부시게 드높인 전통 장의 장인(匠人)이 있다. 바로 식품명인 제35호 진장 명인 기순도(76)씨다.

기 명인은 1972년에 전남 담양 장흥 고씨 문중의 10대 종부로 시집을 와 가문 전래의 비법으로 장을 담그는데 한평생을 바쳤다. 44살이 되던 해에 명인은 주위의 권유로 집안에서만 내려오던 가문의 장을 사업화했는데, 당시 항아리 50개로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항아리 수가 1,200개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종가 마당에 들어서면, 대나무와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운데 천 여개의 장 항아리들이 도열해 있는 장면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인터뷰 전날에도 CNN과 온종일 촬영을 진행했다는 명인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종가를 방문하는 손님에게만 내어준다는 간장 차를 권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명인에 따르면 우리 전통 장을 대표하는 것은 간장으로, 간장이 장맛의 최고 결정체라고 한다. 그중에서 명인의 내력을 인정받은 진장은 장맛의 정수(精髓)라 할 수 있다. 진장은 오래 묵혀 진해진 간장이라는 의미이지만, 기 명인의 진장은 그저 단순히 묵혀 오래된 장이 아니다. 우선 장을 담가 1년 간 우려내서 얻은 간장을 별도의 항아리에서 다시 4년간 더 숙성시켜 완성시키는 장이다. 그 과정에서 진한 감칠맛과 단맛이 감도는 진장이 완성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기 명인의 진장은 유명 간장 제조사인 기꼬망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할 만큼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식은 발효를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요. 특히, 남도는 발효의 고장이지요. 저는 찾아오시는 외국손님들에게 꼭 청국장을 끓여서 대접해요. 우리 안에 있는 전통 장에 대한 선입견이 오히려 외국인들에게는 없어요. 오랜 숙성의 시간과 자연 발효가 새로운 미식의 기준이 되고 있는 거 같아요.”

명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추상적으로 느껴졌던 표현의 실체를 맞닥뜨리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연과 운명에 순응하며 한 가문의 종부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

지금 회자되는 전통 한식은 대체로 궁중 음식과 반가 음식을 기반으로 하는 서울지역 음식을 중심에 두지만, 발효 음식만큼은 남도가 중심이다. 남도는 발효 음식이 탄생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우선 산, 들, 바다, 갯벌에서 각종 산해진미가 풍부하게 생산된다. 그러나 기온이 높아 부패하기 쉬워 이들을 오래도록 보관해 먹기 위해 발효 기술을 활용한 저장 음식이 발달했다. 그중에서도 담양은 예로부터 좋은 물과 맑은 공기, 순한 바람, 해안지역보다 적은 기후변화로 장의 맛과 순도를 고스란히 유지하도록 한다.

 

그러나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명인의 장고도 기후의 변화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봄은 짧고 여름이 길어졌다. 여름이 길어져 기온이 높아진 탓에 간장은 더 달아지고, 된장은 더 까매졌다. 서식하는 곰팡이의 종류에도 변화가 생겼다. 명인은 변화된 자연환경에 따라 메주의 크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발효 기간도 단축했다. 장독대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는 맨드라미, 분꽃 및 봉숭아 등을 심어 장 항아리에 그늘이 지도록 했다. 아름답고 소박한 꽃밭에 둘러싸여 있던 명인의 어린 시절 장독대 풍경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기후변화의 위기를 자연에 대한 순응으로 대처하는 명인의 지혜가 인상적이었다.

“장을 담근 지가 50년이 넘었어요. 반백 년이 지났지요. 그런데도 여전히 장을 뜰 때 가슴을 졸여요. 그래서 장 담기 전 꼭 날을 받아서 목욕재계를 하고 철륜제를 지내요. 내가 그걸 안 하면 아마 병이 날 거야(웃음)”

명인은 지난 50년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 과정을 반복했다고 한다. 명인의 장독대는 무척이나 정갈했는데, 장을 담그는 과정뿐 아니라 항아리 하나하나를 소홀히 하지 않고 돌봤던 덕분이다. 이러한 정성이 모여 음식의 맛을 결정한다는 것은 명인의 오랜 믿음이다.

이렇게 단정한 명인의 삶에도 굴곡이라는 게 있었을까 싶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명인이 50세가 되던 해에 남편이 작고하고 공장까지 화재로 소실되는 사고가 일어났다고 했다. 공장은 형체도 없이 타버렸고 당시 2억 원 이상의 손실을 입었다. 이후 명인은 장성한 자식을 잃은 또 한 번의 크나큰 아픔을 겪었다.

“내일 일을 모르는 게 사람이에요. 그러나 그런 일이 나한테만 벌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나만 이렇다고 생각하면 못 살지……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고 넘겨야 죠.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어떤 장인이 되는가 보다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상위개념이다. 순서로 따지면 인격이 기술의 선행조건일 것이다. 자연과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온 명인의 겸손한 삶에서 ‘일하는 방법’과 ‘살아가는 방법’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백미의 으뜸인 장, 장맛 좋은 집은 음식도 달다  

종가는 같은 음식이라도 종가 만의 특별한 방식을 고집하며 가풍에 따른 고유한 음식 맛을 지켜왔다. 특히 종가의 장은 그 집안의 기품과 격조를 보여주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명인의 전통 장은 직접 생산한 죽염을 사용한다. 3년 이상 된 담양산 왕대에 천일염과 지장수를 섞어 1,500도가 넘는 소나무 장작불에 아홉 번을 구워낸 소금이다. 이 죽염을 장 담글 때 사용하면 짠맛은 줄어들고 감칠맛이 더해진다. 명인의 장은 메주 사용량이 많고 숙성 후 간장을 많이 빼지 않는다. 이것 또한 기순도 장 맛의 비법인 듯했다.  

명인은 음식의 간을 반드시 간장으로 맞춘다. 간장은 발효 기간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따로 있고 그 쓰임도 다르다. 숙성 시간에 따라 1~2년은 청장, 3~4년은 중간장, 5년을 넘기면 진장이라 부른다고 한다. 청장은 나물이나 국의 간을 맞추는 데 사용하고, 중장은 일반 음식에 두루 쓰고, 진장은 육포나 조림, 약식 등을 만들 때 쓰인다. 취재를 위해 명인은 간장의 용도에 맞춰 조리한 다양한 종가의 음식을 소개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간장 김치’였다. 소금과 젓갈 대신 명인의 중간장을 사용해 담근 것으로 아삭한 식감과 함께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었다. 종가를 방문한 비건식을 하는 외국인들도 이 김치는 부담 없이 먹는다고 한다.

청장으로 무친 나물도 일품이었다. 명인은 나물의 종류에 따라 수분을 빼는 정도가 전부 다르다고 했다. 명인은 나물에 애벌 양념을 한 후 물기를 짜고, 먹기 직전에 다시 양념을 하는 것이 비법이라고 귀띔했다. 육전과 김부각의 밑간에는 귀한 진장이 쓰였다. 진장의 그윽한 풍미가 음식의 품격을 높였다.

종가의 손님 상에는 담양의 특산물인 죽순 요리가 빠지지 않는다. 백악관 만찬 메뉴로 유명해진 바로 그 딸기 고추장 양념의 죽순 무침이었다. 은은한 단맛이 도는 매콤함이 죽순의 향을 더욱 감미롭게 만들어주었다. 이 고추장은 샐러드와 궁합이 좋고 맵지 않아 어린이나 노인, 외국인들에게 선호도가 높다.

명인이 맨 마지막에 소개한 ‘즙장’은 별미 중에 별미였다. 이 장은 과거 전라도 지방에서는 집집마다 담가 먹던 속성 장으로 가을 음식이라고 했다. 명인의 즙장은 찹쌀 죽에 메줏가루와 함께 절인 고추, 가지, 고춧잎, 무, 무청을 넣고 버무린 후 항아리에 넣고 숯불을 올린 화덕에서 일주일 간 발효시켜 완성한다. 조금씩 밥 위에 올려 비벼 먹으니 짭조름하면서도 뒷맛에 남는 신맛과 단맛의 조화가 일품이었다.

“요새 비건을 많이 말하잖아요. 그런데 우리 음식이 비건이에요. 알고 보니까 우리가 비건을 먹고 산 거더라고요.”

명인은 해외출장을 다니면서, 비건 식단으로서의 우리 한식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완성형에 가까운 한식 채식 식단의 중심에는 장이 있다. 해외에서도 이미 한국의 장을 사용해 새로운 채식메뉴를 만들어 내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무심하게 전통을 지키는 동시에 예민하게 유행을 짚어내는 명인에게서 50여 년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공을 엿볼 수 있었다.

명인의 음식은 쉽고 단순하며 맛있었다. 그런 요리를 한다는 건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어떤 장식이나 왜곡도 없이 맛의 정점을 표현하는 경지가 명인의 음식에 깃들어 있었다. 명인은 이번에 집안에서 전해 내려 오던 음식을 모두 정리해 보았더니 총 100여 가지 정도가 되더라고 했다. 남도 음식의 명맥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명인들의 귀중한 비법이 그들의 언어로 생생하게 전수 보존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전통 장(裝)에 담긴 한식의 우수성과 370년 종가의 전통 장맛을 널리 전파하고자

23년 10월, 한국 음식의 근본이자 문화적 정체성이 반영된 문화유산인 전통 장 제조법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취지로 ‘기순도 발효 학교’가 문을 열었다. 발효 학교에서는 발효 식문화, 전통 장 이론 교육과 함께 메주, 간장, 된장, 고추장, 청국장 등 실습교육을 병행한다. 발효학교 개교에 앞서 명인은 수년 동안 해외 유명 요리 학교에 ‘장 담그기 키트’를 보내는 일을 지속한 바 있다. 고단한 일이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한식 문화를 배우러 오는 이들을 보면, 그 일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이화여대에서 매년 전통 장 담그기 강의를 해왔다. 전통 장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젊은 세대들을 마주할 때면 명인의 시름은 깊어진다. 이것이 명인이 발효 학교를 개교한 이유다.

“전통 장은 한식의 뿌리예요. 외국 셰프들이 많이 찾아와서 만나고 출장도 가보고 하니 생각이 많아져요. 우리 전통 장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누구한테 듣거나 배워서 안게 아니라 내가 보고 느낀 거라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는 거지요.”

명인은 전통 장의 보급을 확대하고 후세들의 접근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전통 장류에 대한 지역별 특색, 종가 대물림 장에 대한 과학적 분석 및 기록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담그기는 2018년 12월 국가무형유산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장 담그기는 문화유산 중에서도 특정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지정하지 않은 ‘공동체 종목’이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장 담그기는 우리나라 전역에서 가정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전승되는 생활 관습이라는 점에서 ‘공동체 종목’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간장과 김치의 종주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경쟁국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고 도전받는 상황에서 이들의 품질 표준을 확립하고 전통을 지켜온 이들을 보호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한식에서 발효의 의미가 그러할 것이다. 남도의 발효 음식은 한평생 전통을 지켜온 명인들과 이를 동시대의 감각으로 풀어내는 셰프들, 그리고 미식에 있어 새로운 경험과 가치를 추구하는 세계인을 만나 앞으로 더욱 그 범위를 넓혀 나갈 것이다.


본 내용은 내일신문 혼을 잇는 남도음식명인 열전에 편집되어 게재되었습니다.


기사를 통해 장 담그기가 공동문화유산임을 넘어 한식 장의 표준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중요 인간 무형문화재의 지정이 필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범준 교수

한라대학교 호텔외식경영학과

미식유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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