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했다. 마음이 복잡했고, 상황도 애매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 말한다고 달라질 수 있을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하는 대신 행동했다. 수업 시간에 일부러 늦게 들어갔고, 선생님이 무시하면 똑같이 무시했고, 친구가 따돌리면 욕을 했고, 아무도 듣지 않으면 소리를 질렀다. 말하지 않아도 행동은 언제나 더 빠르게 전달됐다. 문제를 일으키면 모두가 주목했고, 누구도 묻지 않던 감정이 그제야 존재를 드러냈다.
청소년이 문제 행동을 보일 때, 어른들은 대체로 그 행동만 본다. 지각, 결석, 무단이탈, 폭언, 무기력. 그들은 말한다. “이 아이는 무너졌다”, “도움이 필요하다”, “지도해야 한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행동 너머에 있다. 누군가에게 외면당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볼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는 결국 몸으로 감정을 전달하기 시작한다. 그게 분노든 무기력이든, 혼돈이든 간에, 행동은 가장 직관적인 감정의 언어가 된다. 그 언어는 때로 거칠고, 이해받기 어려우며, 오해를 부른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누군가 한 번만이라도 “왜 그렇게 행동했니?”라고 진심으로 물어준다면, 아이는 말할 준비를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상담실에서 한 아이를 만난 적 있다. 말투가 거칠고, 질문에도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짧게 잘랐던 아이. 학교에서는 그를 ‘지도 대상’이라고 불렀고, 선생님들은 그를 두려워하거나 피했다. 하지만 몇 번의 만남이 지나자 아이는 느리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안 그러려고 했어요. 진짜예요. 그냥 말하면 아무도 안 듣길래, 그냥 확 해버리면 그래도 나를 보니까.” 그 말에 나는 오래 머물렀다. 그는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말을 해도 통하지 않고, 참고 견뎌도 바뀌는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문제를 만들면, 적어도 누군가는 반응해 준다고 믿은 거다. 그것이 그가 배운 유일한 소통 방식이었다.
이 아이는 혼자였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사회 속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단순히 언어가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긴다는 의미다. 아이가 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성장하면, 감정은 굳고, 언어는 닫히며, 결국 행동만이 남는다. 그 행동이 격하고 거칠수록, 그 안에 쌓인 감정이 얼마나 오랫동안 눌려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은 자신을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 채, 몸으로, 얼굴로, 침묵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그것이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표현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제 행동을 보기 전에 그 아이의 표정을 본다. 거친 말투 뒤에 숨은 망설임, 빈정거림 속에 스쳐 지나가는 불안,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눈동자에 숨어 있는 단념. 그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었더라면. 아이는 여전히 문제아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행동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들이, 너무 길어졌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