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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회피, 무표정, 선 긋기

관계에서 살아남는 법

by 일상온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 무리에 속하고 싶었고, 내 말에 웃어주는 얼굴을 보고 싶었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기대는 자주 어긋났고, 작은 용기도 쉽게 꺾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계산이 빨라졌다. 말을 걸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고, 표정을 감추면 오해받을 일도 없고, 선을 그으면 덜 흔들렸다. 관계는 그렇게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릴 땐 표현하지 못했고, 커서는 표현하지 않기로 했다. 말이 적어진 건 침묵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무표정이 얼굴을 지배하게 된 건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드러냈을 때 너무 자주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는 태도는 차가움이 아니라 방어였다. 가까워지면 어쩐지 멀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기대하기 전에 먼저 단념하는 연습이 몸에 밴 거였다.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좀 더 다가가 봐.” “솔직해져도 돼.” 하지만 그 솔직함은 누군가에게는 위험이었다. 한 번 진심을 꺼냈을 때, 그것이 무시당하거나 왜곡되거나 가볍게 넘겨졌던 경험이 있다면, 다음엔 그 마음을 꺼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고는 말한다. “벽이 많아.” “차가운 사람 같아.” “왜 이렇게 단절되어 있어?” 하지만 그 벽은 혼자 쌓은 게 아니었다. 수많은 상황이, 수많은 외면이, 그 사람에게 ‘그래야 살아남는다’고 가르쳐준 결과였다.


나는 그렇게 살아남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업무에서 능력을 인정받기까지 자기감정을 철저히 눌렀고, 누군가 가까워질 때마다 한 걸음 물러났고, 속이 끓어도 무표정으로 버텼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감정보다 거리로 자신을 지켜냈다. 그 방법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방법은 아직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무언가를 바꾸기엔 이미 너무 오래 그런 방식으로 버텨왔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다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스스로에게조차 거리 두는 삶은 결국 자신을 가장 깊이 외롭게 만든다. 관계는 결국 살아남는 법을 넘어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나 그전에는 먼저, 그런 방식으로라도 견뎌온 시간들이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 회피, 무표정, 선 긋기. 그건 사랑받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받기엔 너무 조심스러워진 마음이 만들어낸 생존 전략이었다. 그렇게라도 버텨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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