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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마음에 단어가 없었어요”

by 일상온도

감정을 느끼는 건 익숙했지만, 설명하는 건 어려웠다.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았고, 화가 나도 화났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저 마음 한가운데 무언가 커다란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게 뭔지 몰라서,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껴안고 살았다. 말로 꺼내려하면 늘 막혔다. ‘별것 아닌데 왜 이러지’, ‘이런 말 해봤자 뭐가 달라지나’ 그런 생각들이 먼저 올라와 입술을 막았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에 단어가 없다고 느꼈다. 감정은 있었지만, 그 감정을 데려올 말이 없었다.


감정을 언어로 배운 적이 없었다. 집에서는 감정보다 행동이 중요했고, 학교에서는 설명보다 억제가 우선이었다. “울 일이 아닌데 왜 울어?”, “남들도 다 참는데 넌 왜 유난이야?” 그런 말들이 마음 위에 덧칠되면서, 나는 내 감정을 설명할 권리를 잃어갔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건 달라지지 않았다. 감정을 말로 풀어내는 사람은 오히려 불편한 존재로 취급받았고, 조용히 웃으며 아무 일 없는 척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나는 말하지 않는 법을 익혔고, 결국엔 감정도 흐릿해졌다.


누군가 “지금 어떤 기분이야?”라고 물었을 때 정확히 대답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보며 한동안 멍해졌다. 화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데, 뭔가 무겁고 텅 빈 이 기분을 어떤 단어로 말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사실 괜찮지 않았지만, 그 괜찮지 않음조차 설명할 수 없었기에.


언젠가부터 나는 감정을 말하는 일이 두려워졌다. 어떤 단어를 골라도 충분하지 않을 것 같았고, 설명하는 순간 누군가가 그 감정을 가볍게 여길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시간이 지나면서 굳어졌다. 그 침묵은 오해를 만들고, 오해는 거리감을 만들고, 거리감은 결국 관계를 단절시켰다. 말하지 않음이 내 삶을 침식해 갔다.


이제야 조금씩 생각한다. 감정을 말로 꺼내는 일이 꼭 누군가에게 이해받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그건 나 스스로에게 내 마음을 인정해 주는 일이기도 했다는 걸. 말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괜히 자꾸 떠오른다면, 그건 지금이라도 말하고 싶은 감정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늦게라도 만나주는 것, 그게 내가 나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첫 번째 단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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