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와 소설 그 어디쯤에서...
#001. 방 안 책상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정수리 한가운데 눈에 띄게 흰머리가 도드라진 Dr. T.
책상에 앉아 스마트 폰 화면에 몰두하고 있는 듯한 표정.
Dr. T. : (곤혹스러운 듯 폰의 화면 스크롤을 내리고 올리고 반복하며) 선택할 디자인은 한정적인데, 그 어느 것도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네. 첫 소설인 만큼 너무 강하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은 것이 필요한데...
고양이 형상의 인공지능 캣캣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책 표지 디자인을 검색하기로 결심한 DR. T.
Dr. T. : (건조한 목소리로) 캣캣, 어제 나온 표지 디자인 좀 검색해 줄래? 키워드는 #정돈된 #간결한 #잘 보이는 #짙은 회색 배경 색상 #단순한 #노란 서체 #굵은 #고딕 #상단으로 입력!
인공지능 캣캣은 양양웅냥거리며 소란스레 자신의 배 위에 뛰어 놓은 투명한 홀로그램 화면에 DR. T.가 지시한 여러 디자인 검색 사례를 좌에서 우로 물 흐르듯 보여준다. 때로 강렬한 이미지들이 툭툭 튀어나올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는 DR. T.
캣캣 : 표지 디자인 사례는 총 12만 5679건입니다. 이중 사용자께서 원하시는 스타일을 재입력하시면 의미 있는 결괏값이 나옵니다.
DR. T. : 스타일이라.... 아! 결국 스타일이 문제야. 도대체 스타일이라는 걸 어떻게 일일이 키워드로 입력하지?
캣캣 : 제 손바닥 젤리 한가운데를 눌러주시면 사용자께서 원하시는 스타일에 대한 사전적 정보를 제공해 드립니다. 이 정보를 조합하여 새로운 스타일로 합성한 결괏값도 보여드립니다.
DR. T. : (캣캣의 말랑거리는 분홍색 가운데 발바닥을 누르며) 아르데코 스타일에 서체는 끝이 약간 각이 지고... 아... 이것 이것 정말 아니다.
지금까지 이 이야기는 상상에 기대어 쓴 것이다.
Dr. T. 는 연구자다.
이 시대에 잘 나가는 인공지능이나 최점단 의학 분야는 절대 아닌, 참으로 중간 지대 어정쩡한 곳에 놓여 혼자 자맥질하며 물살을 가르는 외로운(슬프니까 '의로운'으로 바꿔보자) 연구자다.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와 돈으로 해결되는 시대에서 문화를 연구하고 스타일을 연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올해의 트렌드는 특정 브랜드 기업이 잠식한 고유 언어가 되어버린 지 오래된 가운데 혼자 묵묵히 연구라는 녀석과 동행한 DR. T. 는 세월의 덧없음과 연구자의 길이 중단될 위기 속에서 묵묵히 탐구 정신 하나를 괴나리봇짐에 싸매고 길을 떠난다.
누군가 DR. T. 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본다면
간섭쟁이 : 돈 안 되는 연구 아직도 하니?
아마 이렇게 답할 것이다.
Dr. T. : 그 연구가 밥 먹여줬거든요. 넌...(소심한 목소리로) 해보기는 했습니까?
할 수 있는 것이 연구라면 파고파고 또 파고 더 넓게 파고 더더더 넓게 파서 (그런데 이 대사는 누군가의 영화에서 이선균 배우가 술 취해서 말하던 장면인데? 우리 선희 그 장면?)
늘 그랬듯이 삶의 반복 속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매우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결괏값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가야 할 길이 그 길이라면 DR. T. 는 기어코 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삶을 이롭게 하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길이라면 말이다.
Dr. T. : 캣캣 연구와 소설의 합성어를 만들어줘, 이를 테면, 품격있고 우아해보이는 소리의 언어이길 바라.
캣캣 : 르셰르픽션. 이것은 Research(연구)와 Fiction(소설)의 합성어로 프랑스어에서 차용했습니다. 그런데 Dr. T. 연구가 중심입니까? 아니면, 소설이 중심입니까?
인공지능 캣캣은 질문에만 답하는 학습 모델이 아니다.
사용자의 의도와 목적, 숨은 맥락을 읽어내는 고도화된 녀석이다.
뿐만 아니라, 철학적이다.
아직 연구와 소설 그 사이의 접점을 향한 경로를 솔직히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Dr. T.는 알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소설로 읽는 사람이 있고 소설을 다큐멘터리로 읽는 사람이 있듯이 인간의 경험이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상상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더 많다는 것을...
Dr. T. : 좋았어. 르셰르픽션. 배합은 소설이 70% 연구가 30%. 일단 그렇게 설정하고 경로 안내.
캣캣 : 네. 알겠습니다. 경로 안내하겠습니다.
기대 반 의혹 반. 캣캣은 르셰르픽션이라는 이름의 작은 우주선 모양의 아이콘을 삼차원 공간 컴퓨팅 화면에 띄우고는 웅냥냥냥므냥냥냥웅 효과음을 낸다.
Dr. T.는 올해를 시작으로 르셰르픽션호에 탑승하여 천천히 행성을 탐구할 것이다.
이 행성들의 이름은 연구와 서사 그 사이라고 임의로 정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