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경로는 '마지막 날'입니다.
#002 첫 번째 경로
캣캣은 특유의 낭랑한 고양이 울음을 내며 Dr. T를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는 공간으로 안내한다. 이곳은 군데군데 조명이 켜진 듯한 연극 무대처럼 보이지만 초록색 램프가 켜진 각각의 책상과 의자가 있는 일종의 가상 우주선이다. 의자와 책상이 투명했으므로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투명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모두 엉거주춤 스쾃 자세로 구부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몹시 고통스러운 모양새다.
Dr. T. 도 초록색 램프가 켜진 하나의 투명한 책상과 의자를 차지한다. 그리고 캣캣이 건넨 카드 중 한 장을 뽑아 책상 위에 펼쳐놓는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카드 위로 입체 공간이 두웅 떠오른다. 오른손에 센서 장갑을 착용한 Dr. T. 는 입체 공간의 아이콘 하나를 선택한다.
아이콘 : 첫 번째 경로는 '마지막 날'입니다. 소설입니까? 연구입니까?
Dr. T. : 음... 첫째 날이니까 소설로 가보자.
아이콘 :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 날'에 해당하는 소설 키워드는 '황무지'입니다.
황무지라? Dr. T. 는 마지막 날과 황무지의 관계가 너무 뻔한 조합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아이콘의 시작 버튼을 누른다.
#003 소설 안
황무지
[겨울은 따뜻했었다]
탄탄은 느릿한 중저음으로 중얼댔다.
“집중해, 탄탄!”
앞이 캄캄한 이 공간은 낯설다.
차가운 스티로폼 상자 속에 갇혀서 숨쉬기 곤란한? 아니면, 질소 충전제가 섞인 바삭하고 건조한? 약품과 유기물이 마구 뒤섞인 지독한 냄새가 났다.
게다가 텁텁한 공기가 에이프릴의 머리카락을 감쌌다.
'욱, 역겨워!‘
에이프릴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손을 버둥거려도 잡히는 것이 없다.
에이프릴은 초록 회전등을 켜듯 한쪽 눈을 연다.
사방 가득 어둠이다.
“탄탄, 현재 위치는?”
[세이아. 파이. 접견실.입니다.]
“맞아? 헛소리하면 박살 낼지도 몰라.”
[세이아. 파이. 접견실.입니다. 위도. 알 수 없음. 경도. 알 수 없음.]
“뭐? 지면이 없단 뜻이야?”
에이프릴이 탄 타이튜너는 허공을 맴도는 중이다.
마침 쫓아오고 있는 타이튜너의 날갯짓은 한두 대에 그치지 않은 굉음을 내뿜고 있다.
떼로 몰려올 기세다.
“탄탄, 파이는 어디 숨은 거지?”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였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였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였다.]
가끔 탄탄은 고장이 난 시계와 같다.
고장 난 시계라도 하루 두 번은 시간을 맞출 수 있다는데, 탄탄은 훨씬 쓸모없고 형편없다.
에이프릴이 탄탄을 고쳐 쓸 수 있다고 믿은 것이 착각이었을까?
에이프릴은 친구들에게 파이의 실체를 밝혀 그의 옷자락이라도 가져오겠다고 장담했었다.
실력이 뛰어난 대약탈자라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에이프릴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친구들은 그녀를 ’ 잔혹한 하이에나‘라고 불렀다.
에이프릴은 약탈과 방화 교육 시간에 부화를 마친 병아리 중 한 마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부했다.
친구들은 죽은 병아리가 안타까워서 흙에 묻어주자고 했지만, 에이프릴의 생각은 달랐다.
“병아리의 심장이 뛰는지 확인이 필요했어.”
“난 최선을 다해 살리려고 한 것일 뿐이야.”
“진짜 죽은 것인지 확인해야 해. 이대로 땅에 묻을 수 없잖아?”
친구들은 에이프릴의 말과 행동이 과하다고 비난했다.
에이프릴은 주어진 할 일을 미루는 친구들이 오히려 무기력한 백수처럼 느껴졌다.
대약탈과 방화의 날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전사가 필요하다.
친구들은 철이 없다. 그들은 전사가 될 수 없다.
덥고 추운 극한의 날씨 속에서도 여전히 낭만을 추종하다니...
대약탈자에게 낭만은 사치다. 어리석은 에이프릴의 친구들은 모두 세이아를 동경했다.
"세이아의 지도자 파이는 맨발로 걸어. 그가 걷는 자리마다 나비가 날고 벌이 윙윙거렸대."
"풀이 자라고 꽃이 피었다고 하더라. 너 본 적 있어? 꽃봉오리?"
작은 꽃잎이 바닥을 뒹굴듯 까르륵거리는 친구들은 파이를 본 것처럼 말했다.
그것은 대멸종의 날에 이미 사라진 과거가 아니었던가?
적어도 파이가 꽃을 피우는 기교를 부리는 자라면 마땅히 그를 포획하고 발목 어딘가를 잘라 마법인지 아니면 첨단 과학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지하에 남아있는 어른들도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고 탄식하면서도 파이에게 희망을 걸었다.
어른들은 파이를 상상하며 벽에 파이의 초상을 그려 넣었다.
그가 암흑으로부터 구해줄 유일한 인도자라고 믿으면서...
에이프릴은 파이의 그림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파이가 저렇게 생겼다고?
벽에 걸린 파이의 모습은 심란했다. 이마에 깊은 주름이 가득한 남자.
그는 검은색 곱슬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피부는 창백했다. 그리고 언제나 맨발이었다.
그의 발 주변에는 풀과 나비와 벌 그리고 하나의 태양과 달이 떠 있었다.
평화로워 보이는 발아래의 그림과 달리 얼굴이 굳어 있었다.
파이는 절대 편안한 상태가 아니었다.
에이프릴은 파이가 발아래에 평화로운 자연을 짓밟고 서서는 근엄한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60일 전. ‘그것’이 비전(화면)을 켰을 때 흐릿한 피사체가 낯설었다. ‘그것’ 앞에는 정찰 대원 어거스트의 반쯤 잘려 나간 허리가 포탄에 곤죽이 된 기둥 아래에 널브러져 있었다.
군데군데 연결선이 끊어진 자리에는 동력액이 흥건했다. 에이프릴이 ‘그것’을 툭툭 쳤다.
"시작했으면 떠들어 봐."
에이프릴은 공구 상자에서 조악한 부속품을 꺼냈다.
상자에는 낡은 시계, 라디오, 자전거 벨, 쇠구슬, 체인, 막대 모양의 파이프로 가득했다.
[즈즈즈즉....]
에이프릴은 잔뜩 흥분했다. 그러나 좀처럼 연결이 쉽지 않다.
"어쭈? 깡통이 엄청 예민하네."
에이프릴은 실처럼 가느다란 기억 장치를 한 올 한 올 손목시계태엽 장치에 새겼다.
기억 회로는 조심히 다루어야 한다.
인간의 뇌에 이것을 심었다면 평생 머리가 아파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것’이 마침내 작동한다.
[예의는 마음의 거울이다. 괴테]
"뭐야?"
에이프릴은 ‘그것’의 비전 기능 코드가 오류를 일으킨다고 착각했다.
"세이아, 세이아의 위치를 알려줘."
[세이아, 파이가 만든 세상]
"그래, 깡통아! 살아 있었네? 하하."
이제 기억 회로는 모두 작은 시계 안에 자리를 잡았다.
"아참, 이름을 불러야지?"
에이프릴이 손목시계의 뒷면을 본다.
- 품명 '탄탄'
에이프릴은 ‘그것’의 이름을 탄탄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날, 탄탄이라고 부른 ‘그것’의 비전 기능이 켜지면서 에이프릴의 눈앞에 프로젝션이 작동하였다.
탄탄은 어디에서 이런 알고리즘을 학습한 것일까? 단순한 학습일까? 아니면 진짜 누군가의 기억일까? 탄탄이 투사하는 영상은 사계(四季) 중 ‘4월’이었다.
영사된 순간들에는 벚꽃이 흩날리는 거리 한쪽에 연한 분홍의 꽃잎이 쌓였고, 한 무리의 여인이 흩어진 꽃잎을 한 아름 감싸 안고 있었다.
"만져봐! 융단 같아!"
"어머, 진짜네!"
째깍째깍 시간이 갔다.
"이 계절에는 누구나 시인이 되고 시를 쓴다잖아." 중년의 남자가 아내에게 속삭였다.
"이 꽃향기 맡아봐요! 색이 곱다."
"보랏빛 꽃나무 이름은 라일락이야."
봄, 맨발의 아기 뒤에 엄마가 따라간다. 아기의 발아래에 노랑나비가 팔랑거렸다.
봄을 지나 여름, 여름을 지나 가을, 그리고 겨울이 탄탄의 회로 안에서 무한 반복 중이었다.
그중 ‘4월’은 에이프릴의 방 안 가득 투사되고 있었고, 그것이 에이프릴이 태어나서 처음 본 봄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