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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by 지구 사는 까만별


콘크리트 건물의 후미진 응달까지도 햇빛이 밝게 닿는 하지날 행사가 시작되었다. 비가 와서 기계에 야금야금 곰팡이라도 슬까 봐 주최자가 걱정했던 게 무색해지는 쨍한 하늘이다. 널찍하게 깔끔해 보이는 낡은 박람회장의 실내에는 응달처럼 차분한 발자국들이 요란히 섞이고 있었다. 박람회의 호황을 예상치 못한 진행자들은 신입을 시켜 가벽 밑에 간이로 세워둔 이벤트 부스용 상품을 리필해 온다고 여념이 없었다.


시끄럽지 않은 음악과 형형색색의 가렌더가 부스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같은 취미를 가지고도 끝없이 스치기만 하는 행인들은 매대 위에 생경한 물성들을 만지작거렸다. 개중에는 돋보기를 끼고 침묵으로 매물을 들어보는 노년도 있었고, 서너 명씩 모여 다니며 자신의 무용담을 뽐내는 부류도 있었다. 활기가 가득한 무리 뒤편은 행사에 참여한 손님들이 우수수 빠지고 마악 한산해진 참이었다. 홀로 행사 부스에 발걸음이 묶인 한 고객에게 직원이 응대를 위해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손님. 이번 중고 카메라 박람회는 잘 즐기고 계실까요?”

긴 생머리에 체크무늬 옷을 입은 고객은 작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고객의 반응에 직원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잘 즐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고객님들의 성화에 보답하기 위해서 이벤트 중이랍니다. 팝업 행사에 참가만 하셔도 선물을 드리고, 당첨되시면 추후에 더 푸짐한 상품도 드리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무얼 하면 될까요?” 고객은 여전히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열의가 반짝거리며 켜졌다. 직원은 손님에게 인쇄물 한 장을 건네주었다. 종이에는 ‘추억의 장소 공모전’이란 이름의 작은 콘테스트와 QR코드가 첨가되어 있었다.


“이번 이벤트 부스의 기획은 사라진 추억의 장소를 기억으로 복원시키는 겁니다. 공모전이라 해서 거창해 보이지만, 사진을 남길 필요도 없고 글의 퀄리티가 중요한 건 아니니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어요. 장소에 얽힌 추억이라면, 카메라에 꼭 남기고 싶은 피사체에 대한 글이라면 뭐든 좋습니다. QR코드 접속하셔서 찰칵찰칵 추억을 들려주세요. 해보시겠다고 하면 소정의 경품을 드릴게요.”

“아 그렇군요. 이따 집 가서 해볼게요. 고맙습니다.”

쭈뼛거리며 들어와서 경품과 곱게 접은 종이를 들고 활기차게 사라지는 여인의 뒷모습이 흑백필름 속으로 사라지듯 옅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여성은 QR코드로 접속하였다. 박람회가 성황이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듯이, 이미 사이트에는 제법 많은 글들이 게재되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쓴 익명의 글이 여성의 눈에 띄었다.

“저는 평생을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성능 좋고 가벼운 휴대폰 내버려 두고 고물로 비싼 필름 값 써가며 사진을 찍는다는 게 번거롭게도 느껴질 겁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많은 분들이 그렇듯이 저는 그 번거로움이 참 좋습니다. 찰칵 소리 한 장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며 제 인생사를 묵묵히 담아와 준 녀석에게도, 우리에게 전하고픈 메시지도 있겠죠. 카메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 주어 고맙습니다.”



묵직한 카메라에 철컹철컹 느린 시간을 잡아내던 소리... 카메라의 묵직한 무게만큼 그 안에 잡아먹힌 모습과 풍경을 확인하기까지의 시간도 잠자코 묻어둔 소리... 카메라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여성은 의자를 젖혀 창문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잔뜩 찌푸려져 소나기라도 올 기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살짝 닫고서, 냉장고에서 바나나우유를 꺼냈다. 빨대가 바나나우유에 명중하는 순간, 여성은 당시의 막연하던 여름향을 맡았다. 그러자 바나나우유가 줄어드는 속도만큼, 글은 쉬이 채워졌다.

익숙하게 빛바래는 매개체를 다루는 다소 낯선 새로운 공간 속 박람회. 박람회가 끝나고도 링크 속에서는 시공의 유한을 다루는 새로운 박람회가 전당처럼 고요히 복닥거리며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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