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그랑땡그랑...
투명한 유리문을 당기자 호시탐탐 탈출을 노리던 고소하고 달큰한 버터 향이 아르바이트생처럼 손님을 먼저 맞았다. 버터 향만 있는 빵집을 둘러보니 적당한 규모에 아늑하게 꾸며진 실내에 정갈한 기류가 흘렀다. 유리창을 바라보는 빈 테이블의 의자에 앉자, 해가 저물도록 여전히 이삿짐이 풀어헤쳐진 우리 집 층수가 잠시 도망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비어있던 카운터의 뒤편 하얀 커튼이 제쳐지며 사장님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보시고 편하게 주문하세요.”
친절한 음성이 버터 향과 차분히 어우러졌다. 사장님은 수 분이고 나를 기다릴 수 있어 보였지만, 나는 그럴 실정은 못 되었다.
“사장님, 혹시 추천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실은 오늘 이 아파트로 와서 이삿짐을 정리하다보니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내려 왔거든요. 디저트를 뭘 골라야 할지 감이 잘 안 오네요. 카푸치노와 어울릴만한 디저트가 있을까요?”
“아 그럼 단호박 케이크는 어떠세요? 많이 달지도 않고 조합상 괜찮을 거예요.”
“네 그럼 단호박 케이크 조각이랑 카푸치노 우유를 적게 해서 같이 부탁합니다.”
사장님은 트레이에 단호박 케이크와 카푸치노를 예쁜 그릇에 담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홀로 먹는 케이크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따끈한 죽과 짜장면 만이 이사를 마친 사람에게 원기를 충전시켜 주는 건 아니었다. 단호박 크림과 뜨거운 카푸치노가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마다 나는 잡동사니들을 잊고 달큰함의 도움을 받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귀가를 서두르는 시각이라 조용한 실내, 잘 정돈된 공간을 운영하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음성과 몸짓. 이것들은 소음에 예민하고 피로해진 내가 안락하게 심신을 채울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다. 이사를 마친 사람이 섭취하는 정석적인 조합은 아니지만, 뜨겁고 찐한 카푸치노와 케이크 한 조각은 피로로 절여진 나에게 지극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새 동네의 첫인상은 텃세가 아닌 따뜻한 다과였다. 해 질 녘 노을빛은 고층아파트를 붉히고 있었고, 접시를 비운 나는 조금 뒤 남은 짐을 정리하고서 새 집에서 가족을 맞을 것이다. 힘을 얻은 나는 수많은 소일거리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카페를 나설 수 있었다. 카페인과 버터로 낯선 동네를 적응하던 나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안정으로 물들어갔고, 그날 이후에도 난 그 카페를 틈틈이 찾았다.
빛바랜 기억을 부르는 베이커리.
지구 반대편에서 시작한 제과 기술로 내가 오기 전에 이곳에다 개업을 마음먹었던 두 명의 파티쉐를 상상한다. 매일 닦는 통창처럼 투명한 그들은 나처럼 이 동네 위에서 여전히 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설렘에서 정다움으로 주민들에 대한 감정을 옮겨가며 손님에게 즐거움을 한 꾸러미씩 건넸고, 하얀 작업복의 두 파티쉐는 변함없이 정갈하게 진열된 디저트를 위해 변화하지 않은 부지런함을 티 내지 않으며 조용히 불을 밝혔다.
이웃, 멀리서 날아든 지인, 외출에 필요한 카페인 한 컵, 업무 처리... 카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이했고 오가는 사람들이 변해가듯 시간의 흐름을 정문에서 맞아온 라탄 의자들도 낡아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라탄의자를 오가던 작은 흐름 중 하나였다. 첫 환대를 영원히 기억하지만, 함께 자주 카페를 방문했던 이웃이 생의 변수로 멀리 떠났고, 새로 들인 커피머신에 의해 홈카페에 더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내심, 나의 옅어진 동선에 무색하도록 등대처럼 반짝이는 저 카페가 집 주변을 오래도록 밝혀주기를 항상 축복하며 미담을 회상했다.
그날도 선물로 마카롱을 사러 카페의 차임벨을 울렸다. 은근한 조도로 실내의 온기를 뿜어주는 카페는 여전히 내 발자국을 기억해 주었다. 변치 않는 온화한 미소로 반겨주던 사장님은 대신 나에게 소식 하나를 전해주었다. 아파트 어귀에서 영원히 내 그림자를 반겨줄 것 같던 이곳이 우리아파트 앞 골목의 재개발로 곧 영업을 종료한다고 한다.
대단지의 아파트가 지어지면, 골목을 은은히 비추던 종종한 상권은 우리 기억 속에서도 잠들지도 모른다. 이사 온 첫날, 지친 심신을 차분한 달콤함으로 위로해 주고, 지나칠 때마다 동네를 밝히며 내 공간을 조명해 주던 단아한 카페. 가게처럼 차분하게 세월을 지켜온 성실한 그들도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나를 환대해 준 그들을 내가 어찌 잊겠는가. 빠르게 지나가고, 소란하게 호소하는 현대인의 터전에 자리 잡아 차분하도록 찬찬히 삶을 이어 줄 달콤한 동력을 만들어온 그들의 공간. 보타닉한 어느 가정집에서 마들렌 한 조각과 따끈한 홍차로 기억을 찾아가는 영화처럼, 그들은 내가 이곳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묵묵히 우리동네의 한 켠을 밝게 회상토록 했다. 가게의 불은 꺼지더라도, 지친 순간 받았던 호의는 오래도록 마음의 등불이 된다. 그들이 팔아온 건 디저트이자 수많은 주민들의 안식과 내일이었음을...
차분한 태도로 가게를 운영해 온 등대지기의 휴식에 기나긴 찬사를, 은은한 등대가 사라질 이 동네에 약간의 추도를 남긴다. 그들에게 휴식이 끝나 새로운 등대를 여는 날이 온다면, 내가 그들이 만든 달콤함을 그들에게 선물해 줄 날이 오기를.
P.S 이 글을 우리 동네 베이커리 카페 사장님께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