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다시 읽기: 사랑에 관한 셰익스피어의 50편의 유언장
제1장 셰익스피어를 찾아서
1-1. 세이렌의 신화
역사는 불멸의 영웅으로 기록했지만 그들의 마지막은 비참하였다. 전쟁 10년 차에 트로이 영웅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죽였다. 파트로클로스는 전쟁을 거부하는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쓰고 아킬레우스가 되어 헥토르에게 싸움을 걸어 왔다. 싸우면서 아킬레우스가 아닌 걸 알았지만 생사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복수의 불길은 활활 타올랐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여 시신을 전차에 매달아 트로이 성을 열두바퀴나 돌며 끌고 다녔다. 전쟁보다 여인과의 사랑을 더 좋아했던 아킬레우스는 형의 복수를 다짐해 왔던 파리스의 화살을 맞고 운명한다. 파리스는 필록테테스가 쏜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을 맞고 죽음을 맞는다. 전쟁의 끝은 모든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다. 헥토르는 아내 안드로마케를,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를, 파리스는 헬레나를 두고 눈을 감는다. 전쟁의 여신은 막강했고 사랑의 여신은 사랑을 지켜줄 힘이 없었다. 난공불락이었던 트로이 성은 성내부로 침투한 '트로이 목마'에 잠복해 있던 오딧세우스 일행에 의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목마는 오딧세우스의 지략과 계략이 만들어낸 10년 전쟁의 마침표였다. 파리스의 태몽이 예언했듯이, 트로이는 불바다가 된다. 트로이의 파리스왕자가 스파르타 헬레나 왕비를 유혹해 야반도주하면서 시작된 트로이 전쟁은 나라가 망하고서야 끝났다.
그리스 이타케 왕 오딧세우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10년 만의 귀향길에 오른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는 귀향길에 오른 오딧세우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 바다를 떠도는 10년간의 모험담을 풀어 놓은 서사시다. 오딧세우스는 귀향하는 도중 만난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에게 부하들이 희생당하자 그의 외눈을 찌르고 탈출한다.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포세이돈의 분노를 사 12척의 배 중 11척이 침몰한다. 오딧세우스의 배만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아 아이아이에 섬에 당도한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 키르케가 살고 있는 섬이었다. 손님을 후하게 대접한 뒤에는 마법의 지팡이로 짐승으로 변신시켜버리는 심술궂은 마녀였다. 하지만 용맹과 지혜를 겸비한 오딧세우스 앞에 키르케는 아름다운 여인일 뿐이었다. 키르케와 1년간의 환락을 보낸 후 오딧세우스는 부하들의 성화에 못이겨 다시 귀향길에 나선다. 떠나는 오딧세우스에게 키르케는 항해 도중 만나게 될 위험을 알려 준다. 세이렌 자매는 그 첫번째 관문이었다. 키르케는 치명적인 목소리의 세이렌 자매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인간들은 누구건 다 유혹해요. 가까이 다가갔다가 세이렌 자매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영영 집으로 못돌아 갈 거예요. 세이렌 자매가 풀밭에 앉아 낭랑한 노랫소리로 호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주위에는 온통 썩어가는 남자들의 뼈가 무더기로 쌓여 있지요. 그대는 재빨리 그 옆을 지나치되 꿀처럼 달콤한 밀랍을 이겨서 선원들의 귀에 발라 주세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듣지 못하게 말예요. 그러나 그대 자신은 원한다면 들으세요. 그대는 돛대를 고정하는 나무통에 똑바로 선 채 전우들로 하여금 그대의 손발을 묶게 하세요. 돛대에 밧줄의 끄트머리를 매게 하세요. 그러면 그대는 즐기면서 세이렌 자매의 목소리를 듣게 될 거예요. 그대가 풀어 달라고 전우들에게 애원하거나 명령하면 그들이 더 많은 밧줄로 그대를 묶게 하세요.”
허버트 드래이퍼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1909년
캔버스에 유채, 213×177 cm, 페렌스 미술관
키르케가 알려준대로 오딧세우스는 부하들의 귀에다 밀랍을 바르고 자신의 손발은 돛대에 묶게 한 후 세이렌의 섬으로 다가갔다. 매혹적인 세이렌의 노랫소리에 오딧세우스는 몸부림치며 부하들에게 밧줄을 풀어 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부하들은 오히려 더 많은 밧줄로 그를 꽁꽁 묶었다. 그렇게 세이렌의 유혹을 물리치고 오딧세우스 일행은 무사히 섬을 빠져 나갔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울릭세스와 세이렌들], 1891년
캔버스에 유채, 100.6×202cm,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딧세우스』에 나오는 ‘세이렌의 신화’는, 인간은 욕망과 유혹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호메로스의 생각이 투영돼 있다. 오로지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밧줄로 꽁꽁 묶게 하고서야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존재다. 욕망에 굴복하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호메로스의 예리한 통찰은 그리스 인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과는 대척점에서 인간의 본성을 논하는 정치사상사의 한 축이 되어 왔다. 그로부터 현실주의 역사관에 기반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기록되었고, 인간본성의 양면성에 대한 자각은 이후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와 몽테스키외, 제임스 매디슨의 권력분립론의 토대가 되어 현대 민주주의 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권력이란 스스로 팽창하고 독점하려는 야망이 있으며 집중된 권력은 남용과 전횡의 위험성이 크다. 그렇기에 권력은 쪼개고 분리시켜 상호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권력의 남용을 막을 수 있다. 야망에는 야망으로 대항하게 함으로써(ambition against ambition) 인간사회의 욕망과 갈등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런 발상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의 상호견제를 통한 권력분립 이론을 만들었다. 오딧세우스와 선원들이 세이렌의 치명적인 유혹을 이겨내도록 하기 위해 상대의 힘을 빌려 밀랍으로 귀를 막고 손발을 돛대에 묶도록 한 것과 같은 이치다.
키르케의 조언에 따라 오딧세우스는 자신과 선원들이 세이렌 노랫소리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성적' 판단을 했다. 이에 따라 자신은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틀어 막고 선원들은 자신의 손발(욕망)을 밧줄로 묶게 함으로써, 세이렌의 바다를 무사히 통과한 것이다. 인간은 유혹과 욕망에 약한 존재라는 인식을 하는 데까지는 충분히 이성적이지만, 외부의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절제력을 발휘할 정도로 충분히 이성적인 존재는 못된다. 따라서 인간에겐 욕망을 구속하는 자기통제장치가 필요하고, 그럼으로써 자기파멸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세이렌 신화에 담겨있는 의미다.
인간과 정치사회에 대한 냉철한 현실주의적 인식. 셰익스피어가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이 뒤범벅된 복합적인 존재이며 이성적이기보다 오히려 감성적 존재에 더 가깝다. 선한 자도 한 순간에 악한 자가 될 수 있으며 악한 자도 본래부터 악하기만 한 자는 아니다. 선악의 본성이 복잡하게 뒤얽힌 존재,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인간의 모습은 그런 것이다. 인간은 유혹과 욕망에 흔들리며 파멸의 경계선에서 위태롭게 서 있다. 그런 인간의 모습 속에서 인간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길. 셰익스피어의 희비극과 역사극들을 읽으면서 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읽었다. 자신의 육신과 의식을 둘러싼 껍데기와 가식을 벗고 오로지 맑은 영혼과 열정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다. 짧지도 않지만 길지도 않은 52년 인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남긴 것, 내가 읽은 것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