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서울로 (2)
서울에 대한 열망은 어릴 때부터 존재했다.
최초로 서울에 갔던 기억은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6학년 겨울방학 서울에 사셨던 이모네 집에 갔을 때였다.
외갓집 친척 모임이 매년 신정에 있었는데, 외삼촌 3분, 우리 집, 이모네 이렇게 다섯 집이 돌아가면서 모임을 주관했었다. 우리 집이나 큰 외삼촌네는 시골이니까 특별할 것은 없었는데, 모임 장소가 도시에 사는 이모네, 외삼촌네일 땐 그해 겨울방학 제일 기대되는 일이었다.
이모네 집에 처음 갔을 때가 벌써 30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도 몇 가지 장면이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전주에서 기차를 타고 영등포역까지 간 후, 다 늦은 저녁때였는데 엄마가 앞장을 서서 버스를 타고 이모네 집까지 갔던 기억. 그때 엄마가 줬던 동그라미 버스 토큰을 쥐었던 감촉.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어둡지만 불빛으로 화려한 서울 시내가 굉장히 낯설었던 것까지.
그 이후 서울과 특별한 연관이 없었지만 막연히 언젠가 거기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수능을 보기 전 수시전형에 응시한 학교가 딱 한 군데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성균관대학교였다.
왜 하필 성균관대학교였을까?
소위 스카이라고 말하는 학교는 자신이 없었고 성균관대학교 정도면 비벼볼 만했다고 생각해서?
대학교 이름이 멋있어서?
2004년 10월 중순쯤 수시 논술 시험을 보러 가야 했는데, 전주에서 서울까지 시험 당일에 가기 빠듯해서 전날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갔었다. 그때 도입된 지 얼마안 된 KTX를 전주역에서 익산역까지 가서 갈아탄 후 속도가 몇이나 나오는지 계속 봤던 것 같다. 대전정도까지 가지 200km/h? 였던가?
서울 용산역에 도착한 후 이번에도 엄마가 앞장서서 성균관대학교가 있는 혜화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많은 사람 틈바구니에서 엄마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잡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도착한 혜화역에서 조금 나오니 은행나무 가로수가 쫙 펼쳐져 있고, 옷가게 식당들이 즐비한 그 거리에서 엄마가 찾은 여관에서 하루 묵은 후 다음날 아침 시험을 보러 갔었다. 시험은 당연히 어려웠었다.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고 여성 인권에 대해 쓰라고 한 것 같다. 그 이후 다시 그 책을 읽진 않았는데 제목만은 정확히 기억나는 것을 보니 정말 형편없이 쓰고 나왔었나 보다.
결과는 탈락.
그렇게 대학을 가고, 서울에 대한 미련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니었나 보다.
초등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할 때 어느 지역에서 시험을 칠까 고민을 했다. 대학 동기 대부분이 지역가산점이 있는 경남을 치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나는 연고가 경남도 아니었고, 앞으로 경남에서 살 생각도 크게 없었기 때문에 경기도로 시험을 쳤다. 왜 서울이 아니었을까? 서울은 지역가산점(지금 임용 제도는 잘 모르겠는데 아직도 지역가산점이 있으려나)이 8점이나 되었고, 경기도는 지역가산점이 그보다는 낮았으며, 내가 갖고 있는 한자 자격증 덕분에 점수를 일부분 보완할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결과는 또 탈락!
3차 시험 중 1차는 무난히 됐지만, 2차 시험에서 소수점 차이로 떨어졌던 처음의 실패로 한동안 방황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시험을 준비할 때는 1년 중 6개월은 고향집에서 공부를 하고, 나머지 6개월은 서울 노량진에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염원하던 서울살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노량진에서 학원과 고시원을 왕복하며 24살을 보냈을 땐, 넘쳐나는 공무원 경찰 교사 준비생들 사이에 끼어서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볼 엄두도 못 냈었다. 그저 여기서 나머지 공부를 마치고 노량진이 아닌 어디로든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6개월 서울살이 하면서 답답할 때면 가끔 지하철을 타고 명동이나 용산 뿌리 서점에 가는 일이 스트레스 해소였다.
겨우 24살이었는데, 내가 나아갈 방향이 얼마나 많고 다양했는데 오로지 교사 한 길만 있는 줄 알고 달렸다니. 너무 아깝고 안타깝다.
깜빡이도 넣고, 우회전, 좌회전, 유턴도 했어야 했는데 너무 한길만 보고 달렸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막연한 후회일 수도 있다.
전철이 반짝거리는 한강 위를 달릴 때도 강 너머를 보지 않고 허름한 내 발끝만 보았다.
서울에서 공부를 하면서 처음에는 당연히 서울로 임용을 보려고 했다. 한번 더 공부하는 김에 기왕이면 서울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시험준비 기간 내내 목표는 서울 임용이었고, 마음은 단단했다.
하지만 두 번째 임용을 보던 2009년(2010년 임용), 계속 줄여오던 교사 임용 티오가 급격히 줄었고 서울뿐만 아니라 지역가산점이 있는 경남도 그 수가 전년도의 절반으로 줄었었다.
동기들보다 1년 더 하는 공부, 기왕이면 서울에서 보는 것이 알량한 자존심을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임용 시험 접수하기 전까지도 서울로 시험 보려는 마음은 굳건했는데, 엄마의 전화가 마음을 바꾸게 했다.
-꼭 서울로 봐야 하니?
엄마는 꼭 서울로 가서 살라고 했다.
엄마 본인도 20대 초중반을 서울에서 사셨고, 결국 뿌리를 못 내리셨지만 어린 시절 나를 서울로 처음 이끈 분이 바로 우리 엄마였다. 그런 엄마도 줄어든 티오 앞에 지금껏 노력한 1년이 헛수고가 될까 싶어 그렇게 말씀하신 거다. 물론 엄마의 말 때문에 경남으로 시험을 봤다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또다시 1년을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6개월 동안 서울에서 본 것이 아름다움보다 어렵고, 답답한 임용 재수생의 시선이었기에 멀리 볼 여유가 없었다.
결국 임용을 경남으로 보았고, 다행히도 합격했다.
그렇게 나의 서울살이 꿈은 끝이 났다.
만약 서울로 임용이 되었다면?
만약 처음에 가고 싶었던 대학에 입학했다면?
당시엔 사소하다고 생각했던 결정이 훗날 커다란 변화로 이어지는 것이 새삼스럽다.
아이들과 서울 여행 둘째 날 첫 번째 간 곳이 성균관대학교였다.
들어가지 못한 한을 풀려고 여행 코스에 넣은 것이 아니라 성균관대학교 600주년 기념관에서 어린이 뮤지컬 바다 100층짜리 집 공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혜화역에서 내려 조금 헤매다가 걸으니 성균관대학교가 보였다. 엄마랑 20년 전에 왔던 그 모습은 당연히 없었지만 그때는 못 보았던 조선 최고의 학교 진짜 성균관이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뮤지컬로 생각보다 노래도 좋고 1시간 꽉 채워 재미있는 바다 동물들을 볼 수 있어 공연도 좋았지만 그 더위에 더 좋았던 것은 성균관 명륜당 앞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를 보며 잠시 앉아 있었던 시간이었다. 공연을 본 후 아이들은 불볕더위에 시원한 카페, 식당에 먼저 들어가길 바랐지만 나는 지체 없이 성균관으로 들어갔다. 유생회관? 옆을 쭈욱 걷다가 여긴가 싶어 들어가니 좁은 출입구는 잠시 넓은 명륜당 앞마당이 보였다. 명륜당을 다 가리는 느티나무? 도 장관이었지만 더 멋진 것은 줄기가 몇 갈래로 갈라져서 웅장한 은행나무 두 그루였다. 수령이 500년이 넘는 이 은행나무는 중종 때 문신 윤탁이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가치나 자태가 범상치 않다. 예전에 수시 논술 시험을 보러 성균관에 왔을 때 어느 언덕에 은행나무가 흐드러지게 샛노랬는데 아마 이 나무였을까?
엄마가 예전에 이 학교에 시험을 보러 온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이 말했다.
-엄마가 성균관 대학교에 들어갔으면 아빠랑 결혼도 못했을 거야.
남편이 한 농담에 아들이 거들며 말했다.
-아! 엄마 성균관 대학교 들어가지! 그러면 나도 서울에 살았을 텐데.
-그러면 너도 없는 거거든!
아이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허투루 못하겠다.
아빠의 살벌한 눈길을 피해 발걸음을 빨리하는 아이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리움 미술관이었다.
여기도 조금 추억이 있는 곳인데, 예전에 동생과 1박 2일로 서울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동생이 알려준 곳이었다. 그때도 참 세련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갔을 때도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입장객들이 정말 많았다. 사진작가로 변신한 아들이 내 핸드폰으로 수백 장의 문화유산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나는 예쁜 도자기와 나전칠기로 장식한 그릇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고미술품을 전시한 M1 전시관만 봐도 다리가 후들후들 거렸다.
변치 않은 아름다움, 시대를 넘나는 예술혼은 모르겠고! 일단 너무 힘들어서 근처에 카페에서 잠시 쉬다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전쟁기념관이다. 미술관이 딸을 위한 곳이라면 전쟁기념관은 아들을 위한 곳이라고 하겠다. 이곳에서 아이가 마음껏 비행기, 탱크, 헬리콥터, 미사일 보러 다닐 동안 나는 앉아 쉬었다.
수많은 전쟁을 극복하고 싸워서 이긴 선조들의 이야기,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 우리나라에서 일어났거나 우리나라 군인들이 참여했던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이 장소의 의미도 중요했지만 일단 쉬었다.
숨 돌릴 틈 없이 돌아다니는 아들을 잡으러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둘째 날 여행은 서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의 넋두리가 여행기보다 많았다. 서울에 살지 않아도 이처럼 서울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넘쳐나는 것을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서울 사랑은 대단한 것 같다!
그나저나 나는 아직도 서울 입성을 포기하지 못했나?
우리 아이들에게 서울의 장점을 마구 어필하면서 여기서 살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딸이 단칼에 대답한다.
-나는 거제가 좋아! 엄마랑 거제에서 살 거야!
-으음... 그래~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