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음해부학

나는 어떻게 마음이 되었는가?

by 영업의신조이

13화.

사상 _ 구조 위에 떠오른 나의 철학



사상은 마음이 선택한 해석의 습관이다.

사고가 흘러간 자리 위에 굳어지는 무늬이며, 감정과 기억, 판단과 고통이 한 방향으로 반복되며 남긴 내면의 주름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생각을 떠올리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축으로 정리되고 반복과 누적을 거쳐 굳어질 때 비로소 ‘사상’은 그 향기를 갖는다.


사상은 단일한 생각이 아니라 생각들의 배열 방식이며, 감정을 대하는 태도이고, 세계를 바라보는 틀이며,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다루어 왔는가에 대한 총합이다. 감정 위에 구조를 세운 사고가 다시 마음이라는 통합적 장을 거쳐 응축되었을 때, 그것은 사상이 된다.

그것은 단지 머리로 떠오른 결론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낸 방식의 결정체다.



삶의 철학은 고백이 아니라 누적이다.

우리는 어떤 사변적인 명제를 외우는 것으로 철학을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침에 어떤 말투로 인사를 건네는지, 누군가의 침묵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반복되는 슬픔에 어떤 눈빛으로 응답하는지 같은 사소한 선택들 속에서 이미 철학을 살아내고 있다. 하루하루 감정의 물결에 흔들리면서도 다시 중심을 잡으려 했던 모든 시도, 그 모든 작은 판단과 반복된 도전과 결과들이 모여 나의 철학이 된다.

그것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굳어진 내면의 문장들이며, 삶이 내게 새겨준 어조이다.

그 무늬가 구조화되고 나만의 향기를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사상이라고 부른다.



사상은 머리로 배운 것이 아니라 살아낸 마음의 깊이에서 천천히 솟아오른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이웃을 돕다가 되레 손해를 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답답하게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내가 누군가의 짐을 대신 들고 있을 때 문득 그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내 안에서 오랫동안 자라난 사상이었다. 설명되지 않은 방식으로 나를 구성하고 있던 그 무엇, 말보다 오래된 교육, 침묵보다 선명한 유산.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사상은 언어가 아니라 선택이며, 머리가 아닌 몸으로 전해지는 판단의 구조라는 것을.



그러나 사상은 나를 세우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가두기도 한다. 한 번 형성된 해석의 틀은 모든 것을 그 틀 안에 넣으려 한다. 내가 누군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특정 상황 앞에서만 유독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이유... 그 모든 무의식적 습관들은 사상이 의식보다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상은 나를 지키는 성벽이 되지만, 동시에 나의 세계를 좁히는 벽이 되기도 한다.



사상은 내가 살아온 모든 흔적의 흔적, 기억의 기억이 쌓여 남긴 지문과도 같다. 감정의 파동, 순간적인 생각, 무의식의 기억, 마음의 울림, 사고의 구조가 켜켜이 겹치며 남긴 주름이 곧 나의 철학이 된다.

그렇기에 사상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내가 겪어온 모든 고통과 기쁨, 상처와 성찰이 남긴 고유한 문양이다. 이 흔적은 누구에게도 복제될 수 없는 나만의 것이며, 그래서 사상은 사랑스럽고 애잔하며 동시에 너무나 고귀하다.



그러나 바로 그 소중함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자신이 가진 사상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해진다. 그럴수록 내 기준과 맞지 않는 것, 내 틀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배척하거나 배타적으로 바라보기 쉽다.

사상은 나를 세우는 성벽이 되지만, 동시에 이렇게 나를 닫아버리는 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내 사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그만큼, 타인의 사상 역시 똑같이 희소하고 고귀하다는 점이다.

내가 지켜온 철학이 내 삶의 무늬라면, 타인의 철학도 그들의 삶이 새긴 유일한 문양이다. 그러므로 진짜 철학적 태도는 나의 사상을 지키는 힘만큼, 타인의 사상을 존중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내 철학이 나에게 절대적인 것처럼, 타인의 철학도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의 차이를 배척하지 않고, 각자의 고귀함을 인정하는 길 위에 설 수 있다.



사상이 내 안의 언어가 되어버리면, 나는 그 언어 외의 모든 소리를 의심하게 된다. 다른 방식의 사랑, 다른 형태의 고통, 다른 결의 신념 앞에서 나는 주저 없이 구분하고, 판단하고, 해석하려 든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타인을 내 사상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상은 흔들림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진짜 사상은 완결되지 않은 신념이며, 지속적인 질문을 품고 있는 형태이다. 누군가의 상처 앞에서 멈춰 설 줄 아는 마음, 나와 다른 믿음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는 시선...

그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사상의 증거다.

진짜 철학은 언제나 이렇게 유연하다.



나는 어느 날 한 줄의 문장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진실로 진실을 사랑했지만, 그 진실은 나를 결국 선택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내 안에 오래도록 자리해 있던 신념이 조용히 무너져 내렸다. 진실은 언제나 옳고, 옳음은 결국 모두에게 인정받는다는 나의 믿음, 나의 철학.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내 마음속 깊은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한 해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의 사상은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 틈 사이로 더 넓고 복잡한 세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사상은 마음보다 늦게 오지만 훨씬 오래 머문다.

사상은 내 감정의 색을 결정하고, 내가 내리는 판단의 언어를 지배하며, 결국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대답까지 대신한다. 우리는 말보다 사상으로 상처를 주고, 말보다 사상으로 더 깊게 용서받는다.

사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관계의 결마다 흔적처럼 스며 있으며, 나의 모든 선택의 저변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사상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마음이 반복적으로 살아낸 해석의 리듬이다.



사상은 철학적 선언이 아니라 내면의 생활 방식이다. 그것은 무늬이고,

흔적이고,

문장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방식에 책임을 지기 시작한다.

그 책임이 곧 방향이 되고, 그 방향이 곧 의지의 뿌리가 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