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3화.
남겨진 피아노 _ 저녁의 빛 속에서 다시 되살아난 멜로디
시흥 갯골생태공원,
자그만 언덕 끝자락에 오래된 피아노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야외에 그대로 노출된 채 바람과 비를 여러 해 맞은 탓인지 표면은 갈라져 있었고, 건반들은 색이 바래거나 벌어진 채 고요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녁으로 기울어가는 시간이어서 그런지 공원은 거의 비어 있었고, 나지막한 잔디 언덕은 마치 먼 기억을 품고 깊은숨을 고르는 듯 조용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서 피아노만이 붉은빛을 머금은 채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앞에 앉았을 때 저는 이 피아노가 단순히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손끝을 기다리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도 연주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그 안에는 닿지 못한 감정들이 작게 떨리는 모습이 어렴풋하게 자리해 보였습니다.
의자에 앉아 손끝으로 조심스레 건반을 눌렀을 때,
오래 묵은 먼지가 기지개를 켜듯 일어나는 작은 울림이 퍼졌고, 그 순간 피아노 속에 숨겨져 있던 시간들이 조용히 깨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울림은 어머니가 따뜻한 손으로 건반을 눌러주던 기억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했습니다. 어린 마음을 포근히 감싸주시던 그 온기, 손끝에 스며 있던 사랑이 음표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었던 시절. 피아노의 갈라진 표면을 타고 내려오는 노을빛이 그 시절의 숨결을 다시 불러낸 듯했습니다.
그다음에는 오래 전의 어떤 이가 꿈을 향해 건반을 두드리던 숨결이 스쳐갔습니다.
힘겨운 날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른 입술을 깨물며 연습을 이어가던 청춘의 땀 냄새와 열정. 실패와 흔들림 속에서도 어딘가에 닿을 것이라는 희망 하나만으로 다시 의자를 끌어당겨 앉던 마음.
그 시간이 이 피아노의 몸 어딘가에 아주 미세하게 남아서, 지금도 조용히 떨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이 머물던 순간의 흔들림이 설레이듯 떠올랐습니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며 떨리는 손끝으로 첫 음을 눌렀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고백을 준비하며 건반 위에서 손가락을 조심스레 말아쥐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풋풋한 떨림, 조심스러움, 애틋함들이 피아노의 깊은 곳에 오래 저장되어 있다가, 저녁 햇빛에 다시 선명하게 드러나는 듯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의 결들이 피아노의 몸을 따라 천천히 되살아나며, 언덕 위에 스며드는 노을과 함께 하나의 큰 정서로 묶여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피아노를 흔히 ‘버려졌다’고 말하지만, 그날 제가 본 것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 존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그저 다음 감정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때 수많은 마음을 품어냈던 존재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침묵 속에서도 끝나지 않은 멜로디가 아주 작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그날의 언덕은 한동안 숨을 멈춘 듯 고요했고, 제가 눌렀던 몇 개의 음은 완성된 곡이 아니었지만 오래된 감정의 파문을 깨우며 서로를 이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때 문득 시 속의 한 연이 마음 깊은 곳에서 떠올랐습니다.
“손끝이 다시 닿는 순간
그는 울고, 노래하며 다시 살아날 것이다.”
시집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중에서...
이 문장은 피아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우리 마음속의 어느 자리에서도 다시 울릴 수 있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 안에도 저 피아노처럼 오래된 건반 하나가 남아 있을지 않을까?'
아무도 눌러주지 않아 먼지가 얹힌 감정의 음,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오래 기다려온 한 음표.
누군가의 손끝이 닿으면 반드시 되살아날 수 있는, 끝나지 않은 마음의 잔향. 그리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을 그 꿈들...
그것은 슬픔 때문에 멈춰 있었을 수도 있고, 오랫동안 아껴 말하지 못했던 고백일 수도 있으며, 잊힌 줄만 알았던 꿈의 첫 음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닿지 못했을 뿐이지, 손끝이 닿는 순간 언제든 다시 울릴 것입니다.
'남겨진 피아노'는 바로 그날 노을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갈라진 몸으로도 여전히 사랑을 품고 있는 피아노의 마음을, 아무도 대신 말해주지 않는 그 조용한 입장을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언덕에서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피아노의 울림이 마음의 한 자리를 오래 붙잡아두는 것 같았습니다.
붉은빛이 피아노의 표면을 타고 흐르고, 오래된 건반 사이에서 기억의 먼지가 잔잔히 흔들릴 때...
멀리서 아들이
“아빠, 이제 가야 해요!”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내도 함께 손짓하며 저녁 식사 약속에 늦겠다며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상하리만큼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엉덩이는 의자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발끝은 아직 한 음을 더 눌러보고 싶다는 듯 페달을 단단히 딛고 있었습니다. 마치 피아노가 마지막 한 음을 들려달라며 조용히 제 손목을 붙잡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결국 저는 가족의 부름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습니다.
언덕을 천천히 내려오며 뒤돌아본 순간, 피아노의 몸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멜로디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 보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이 언덕에 오면,
이 피아노는 또 한 번 우리 안의 잊혀진 건반을 깨워줄 것이라고.
"우리들 마음속 오래된 건반 하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손끝이 닿는 순간, 언제든 다시 노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