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4화.
기억의 끈을 묶다
해외 출장을 준비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캐리어를 열어두고 신발장을 들여다보다가 저는 문득 현관 바닥에 자연스럽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게 되었습니다.
시선을 낮춘 자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된 운동화 한 켤레였습니다. 고무창은 갈라져 있었고, 끈은 닳아 너덜거리며 힘없이 풀려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운동화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낡은 끈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끼는 순간,
저는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새해마다 결심을 다지며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매던 장면들을 떠올렸습니다. 더 나아가야겠다고, 흔들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세우던 그 시절의 다짐들이 이 운동화 안에 고요히 남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 아빠가 시장에서 사다 주신 하얀 운동화도 생생해졌습니다. 너무 귀해서 신지도 못하고 소풍 전날까지 베개 옆에 꼭 끌어안고 자던 밤들. 운동화 하나에 온 세상이 다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그때의 설렘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사춘기에는 첫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바라보고 싶은 마음으로 학교 운동장에서 그 친구 집까지 괜히 여러 번 오가며 밑창을 닳게 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날은 비를 맞으며 주저앉았다가, 젖은 운동화 속으로 스며든 빗물을 끌어안고 어금니를 꽉 물고 다시 일어서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직장생활에서는 구두가 마치 중세 시대 전장의 갑옷처럼 제 삶을 지탱해 주었습니다. 책임과 각오가 필요했던 날마다, 구두는 제 발바닥을 단단하게 붙들어주며 하루를 견딜 힘을 내게 해주었습니다.
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오던 그 순간,
저는 오래된 운동화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게 되었습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내 고통은
이 끈에 단단히 묶여 있었고
넘치고 또 넘쳤던 기쁨은
고무창 속에서 함께 나이를 먹었다.”
시집 「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중에서...
이 문장은 그날 제가 느낀 모든 감정의 중심이었습니다.
끈에 묶여 있던 것은 운동화가 아니라 제가 지나온 고통이었고,
고무창과 함께 나이를 먹은 것은 운동화가 아니라
제가 살아낸 기쁨과 사랑이었습니다.
갈라지고 닳아버린 흔적들은 사라짐이 아니라
제가 걸어온 시간의 살아 있는 증명이었습니다.
오래된 고무창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운동화를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 하나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저의 어느 계절과 마음의 조각들을 함께 놓아버리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저는 낡음 속에서 오히려 제가 얼마나 자라 있었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닳아 없어진 끈만큼 제 각오도 단단해져 있었고,
마모된 밑창만큼 제 마음도 깊어져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오래된 운동화를 다시 신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운동화를 통해 오래된 ‘저 자신’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현관의 빛 속에서, 성장이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저와 함께 걸어준 어떤 존재의 밑창에서
천천히 익어간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참 많습니다.
괴롭고,
낙심되고,
외롭고,
쓸쓸한 날들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일수록 우리는 다시 걷고, 천천히 뛰고, 잠시라도 산책을 나가며 스스로의 의지를 불태우는 작은 행동 하나로 삶을 이어갑니다.
그때 한 번쯤은 우리가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을 바라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 동안 저를 지탱해 주는 발바닥,
그 발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는 신발,
그리고 달아 없어진 밑창에 스며 있는 저의 지난 시간들을 함께 떠올려보면 그 사소한 묵직함이 오히려 마음을 붙들어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의 신발을 가만히 보아도 그렇습니다.
편마모가 되어 있거나, 낡아 있거나, 더러워져 있거나…
그 모양 그대로가 그 사람의 하루와 버팀과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은 관찰만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고, 서로의 삶을 응원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자 여러분께 오늘 하루만큼은
‘내가 지금 신고 있는 이 신발’을 한 번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기쁠 때도 함께하고, 슬플 때도 함께하고,
외로운 날조차 묵묵히 발을 감싸주던 그 존재의 소중한 공존을 잠시라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그 사소한 순간이 우리 마음을 조금 더 따뜻하게 해 주기를 바라는 저의 작은 소망을 이 글의 끝에 살며시 남겨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