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존재는 이미 아름답다
6화.
오래된 지갑 속 입술
'떠나간 마음이 남긴 기도의 숨결'
사람의 마음은 때때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몇 해 전 두 번의 이별을 지나며 제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던 감정들이,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전혀 다른 형태의 이야기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장모님이 세상을 떠나신 뒤 집 정리를 하다가, 장모님이 늘 손에서 놓지 않으시던 성경책을 발견했습니다. 오래 읽힌 책장에는 손때가 깊게 배어 있었고, 그 속에서 한 장의 편지가 조용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감사하며 살아라.
기도하며 살아라.
이웃에게 베풀어라.
서로 사랑하며 살아라.
그리고 무엇보다,
내 자녀들아…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그 문장들은 누군가의 마지막 유서처럼 절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아가는 동안 매일 마음에 새기고 싶어 남기신 듯한 사랑의 기록이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며, 사람이 떠난 뒤에도 말과 마음이 어떻게 누군가의 삶을 지켜주는지 처음으로 깊이 깨달았습니다.
몇 해 후 장인어른을 떠나보내던 날들.
집을 정리하던 중 팬트리 안쪽에서 오래된 DSLR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장인어른이 젊은 시절 기자로 일하시던 때 사용하시던 카메라였습니다. 손때 묻은 금속의 촉감, 무게감 있는 셔터 버튼, 오래된 기계의 냄새까지. 그 모든 것이 장모님의 성경책 속 편지와 이상하게 겹쳐졌습니다. 두 분이 서로 다른 언어로 남기셨던 사랑이 시간이 지나 하나의 장면처럼 제 마음에 잔잔히 떠올랐습니다.
그 장면을 따라가다 보니, 한 여성의 이야기가 제 안에서 서서히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스스로를 붙들며 하루를 살아가던 한 사람.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아버지의 지갑 속에서 발견된 눈물로 번진 편지 한 장이 그녀의 삶을 바꿔놓는 순간. 그 이야기는 마치 두 분이 남기고 가신 사랑의 잔향이 제 마음속에서 다른 형태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그날 그녀는 지친 하루 끝에서 오래된 가족 사진첩을 꺼내 들었습니다. 사진첩 옆에는 세월이 잔뜩 스며든 아버지의 낡은 지갑이 놓여 있었고, 그녀는 이유 모르게 그 지갑을 조심스레 손에 들었습니다.
손끝이 닿자,
오래전의 시간이 아주 천천히 깨어나는 듯했습니다. 엄마 없이 자란 딸에게 아버지는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어린 마음으로는 그 사랑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랑이 얼마나 조용하고 깊었던 것인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갑을 열자 접혀 있던 편지 한 장이 숨결을 품은 듯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종이는 오랜 눈물에 닿은 듯 부드럽게 휘어 있었고, 글자 하나하나에는 시간이 남긴 흐릿한 떨림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편지를 펼쳤습니다.
“사랑하는 내 딸. 아빠가 너무 미안해. 다시 태어나도 아빠가 되어줄 거냐고 네가 물었지? 그때 바로 대답하지 못한 아빠를 용서해 다오.”
그녀는 숨을 고르며 글자를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왜 그때 대답되지 못했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이해했습니다.
“아빠가 너무 부족해서, 네게 해준 것이 너무 없어서, 다시 네 아빠가 되면 혹시 또 무거운 짐이 될까 봐 겁이 났단다. 그래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단다. 못난 아빠를 용서해 다오.”
그리고 마지막에 적힌 문장은 오랜 세월 동안 전해지지 못한 사랑의 진심 그대로 그녀에게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넌 아빠의 우주란다. 아빠가 가진 전부야.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란다. 아빤 언제나 너를 지켜줄 거야.”
그녀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울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돌아서야 겨우 도착한 사랑 앞에서, 잊어버렸던 시간이 천천히 본래의 의미를 되찾는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편지 속에 남은 기도의 숨결은 여전히 그녀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하늘 어딘가에서 아버지가 지금도 그녀를 향해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당연하지. 아빤 다시 태어나도 너의 아빠가 되어야지. 너를 사랑한다. 내 우주보다 더 소중한 내 딸.”
그 순간,
그녀는 살아가며 놓치기 쉬운 두 가지 사실을 또렷하게 깨달았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들리지 않는 사랑이 있다는 것.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 마음은 말보다 더 먼 곳까지 흐르고, 사랑은 침묵의 벽 너머에서도 여전히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 길고 먼 시간을 돌아서야 겨우 닿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길을 잃기 쉽고, 용기 내어 건네지 않은 사랑은 때로는 한 번도 도착하지 못한 채 남겨진다는 것을. 그래서 아직 말할 수 있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진하게 느꼈습니다. 말이 없으면 마음은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고, 표현이 없다면 사랑은 스스로 길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편지를 삶의 중심에 조용히 새기며 하루를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들리지 않는 사랑도 믿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진짜 사랑은 표현될 때 비로소 누군가에게 도착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진실을 마음에 품은 채, 오늘도 그녀는 남겨진 삶의 우주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들리지 않아도 존재하고, 표현되지 않으면 길을 잃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건넬 수 있는 마음을 살아 있는 목소리로 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