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의지와 실천으로 다시 쓰는 마음의 구조
23화.
감정의 방 — 마음을 정리하면 내가 보인다
감정은 언제나 먼저 다가온다.
생각보다 앞서 몸에 스며들고, 말보다 먼저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때로는 내가 느끼기도 전에 이미 나를 떨게 하고 움직이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감정을 이해하기도 전에 반응하고, 반응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왜 이렇게 행동했을까’ 하고 돌아보곤 한다.
감정은 늘 빠르고 본능적이며, 때로는 거칠고 무른 존재라서, 의식이 여물기 전에 마음의 바닥을 먼저 차지해 버린다.
그러나 감정이 혼란스러운 이유는 감정 자체가 거칠어서가 아니다.
그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방치된 감정일수록 그 무게는 무거워지고,
무거운 감정일수록 삶의 리듬을 흐트러뜨린다.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다.
그저 쌓이고 굳어지고 끈적거리다가, 결국 형태를 바꾸어
다른 종류의 통증이 되어 다시 마음으로 돌아오는 존재다.
그래서 감정은 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고, 어루만지고, 따뜻하게 다루어 줄 때 비로소 흐른다.
이 다루는 과정의 시작은 언제나 ‘이해’에서 출발한다.
감정을 잘 정리하면 마음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어떤 감정이든 그 존재가 분명히 드러나는 순간,
그 감정은 더 이상 나를 휘두르는 힘을 잃는다.
우리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을 때 감정은 점점 끈적한 검은 그림자처럼 고착되려 한다.
하지만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정확히 바라보는 순간,
감정은 비로소 마음의 창을 열어 준다.
그 창을 통해 들여다보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감정이 마음의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감정은 이름을 가지게 되고,
더 이상 나를 삼키는 파도가 아니라 내가 건널 수 있는 잔잔한 물결이 된다.
우리는 종종 감정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감정은 가만히 두면 잠잠해지는 존재가 아니다.
감정은 ‘마음 상태의 이름’이 붙는 순간 정리되기 시작한다.
“아, 내가 지금 슬프구나.”
“나는 지금 화가 난 게 아니라 억울했구나.”
“질투가 아니라 이건 상실감이었구나.”
“무서운 게 아니라 불안했던 거구나.”
“짜증이 아니라 이건 피로가 만든 예민함이구나.”
“섭섭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기대가 무너진 슬픔이었구나.”
“답답함인 줄 알았는데, 이건 ‘결정하지 못한 불안’이었구나.”
“우울함이 아니라,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휴식이었구나.”
“무기력하다고 느꼈는데, 사실은 지친 나에게 쌓인 미안함이었구나.”
“원망하는 줄 알았는데, 이건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었구나.”
감정의 파괴력은 감정 그 자체보다
감정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우리가 감정에 짓눌리는 이유는
그 감정이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 모름을 그대로 방치했기 때문이다.
“감정을 인식하라, 이름표를 달아라, 객관화하라.”
이 말은 처음에는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조금씩 쌓아 올리는 훈련’이다.
그 첫걸음이 바로 감정일기다.
마음의 바닥을 다시 적는 행위.
내 마음의 구조를 손으로 다시 짓는 일.
감정을 정리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방법은 ‘적는 것’이다.
적는 행위는 감정을 언어의 빛 아래로 불러내는 작업이며,
언어는 언제나 감정을 정돈하는 힘을 가진다.
감정일기를 쓸 때 중요한 것은 길이나 형식이 아니다.
아래 네 가지 질문만 꺼내서 솔직하게 적어 내려가면 된다.
“지금 내 안에서 가장 크게 울리는 감정은 무엇인가?”
“그 감정은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그 감정을 통해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그 감정은 내 몸의 어느 부위에서 가장 뚜렷하게 느껴지는가?”
이 네 가지 질문은 감정의 뿌리를 드러내고,
감정의 모양을 조용히 펼쳐 놓는다.
감정이 펼쳐지는 순간 감정은 더 이상 나를 흔들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감정은 애초에 나를 해치기 위해 생겨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감정은 인식되는 순간부터 그 힘을 잃어간다.
나는 수많은 상담과 코칭을 하며 이런 장면을 수없이 보아 왔다.
사람들은 감정을 견디지 못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어두운 창고에 뒤엉켜 쌓인 상자와 같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니, 마음은 언제나 그 상자에 걸려 넘어질까 봐 불안해진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감정은 ‘예측 불가능한 공포’가 되어
우리의 삶 전체를 조용히 잠식해 간다.
반대로 감정이 인식되고, 사랑받으며 제자리를 찾는 순간
내 삶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더 넓고 따뜻한 공간을 가지게 된다.
불안했던 감정은 선명한 형태를 갖추고 자리 잡으며,
그 존재는 더 이상 나를 위협하는 그림자가 아니라
나를 이해하게 하는 또 하나의 통로가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제야 깨닫는다.
감정을 정리하는 일은 감정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나를 다시 바라보고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감정을 인식하는 순간,
나는 나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마음의 방은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