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아래 홀로 남은 여인의 이야기
9화.
피의 밭 _ 순종의 시험
회당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차를 나누고, 고소한 향기를 품은 빵 조각을 서로 주고받으며 친교를 나눴다.
낮게 깔린 대화는 처음엔 친목의 공기였으나 곧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말의 도미노로 변해갔다. 마리아의 부모는 잔을 손에 든 채 어색한 미소를 지었고, 주변의 시선은 그 잔 위로 무심히 흘러갔다.
대화의 끝자락에서 누군가가 속삭였고, 그 속삭임은 곧 물결처럼 번졌다.
“그 집 딸, 요즘 상태가 안 좋다더라.”
“애가 있대, 들었나? 임신이래.”
“아주 배가 산만하게 불렀어. 봤어?”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누군가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고, 누군가는 낮게 혀를 찼다. 그 말들은 품속에 숨은 돌멩이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 장면을 본 마리아 부모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를 마시던 손의 떨림이 그들의 대화를 이어갔다. 문이 닫히자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요. 우리 집안의 체면이….”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계산이 깔려 있었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굳게 다문 입술 옆으로 주머니 속 손이 불편하게 움찔거렸다.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속도를 올려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어요. 이대로 놔두면 이 집은…
내다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체면을 잃을 수도 없어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오명은… 아이 모르겠어요, 어떻게든 해야겠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눈빛이 굳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 속에는 이미 결의가 배어 있었다.
“애만 떨어뜨리면 모두 끝나. 당신이 할 수 있겠어?”
마리아 어머니는 잠시 눈을 감았다.
딸에 대한 연민이 미약하게 흔들렸지만, 그 옆에는 공동체의 냉혹함과 체면을 지키려는 욕망이 더 크게 도사리고 있었다.
“방법이 있지 않겠어요? 약으로…
독한 음식으로… 아니면 약을 먹이면….”
속삭임은 너무 미약해 현실을 흔들 힘조차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농사일로 체력을 소모시키면 자연이 알아서 처리될지도 몰라. 우리가 마리아를 버릴 순 없잖아. 아이만… 아이만 없애면 우리 집도 체면도 모두 살 수 있어.”
남편의 제안은 잔혹하고 현실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집안의 체면, 마을의 시선, 그리고 자신들이 잃을 것들. 그 모든 것을 떠올리는 순간, 잔혹한 합의가 차갑게 자리를 잡았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걸어가며 낮게 말했다.
“제가 독한 약초로 아주 매운 음식을 만들어 먹여볼게요. 이거면 자극이 충분할 거예요. 마리아의 몸이 상하더라도… 이제 어쩔 수 없어요.”
그 말로 두 사람의 암묵적 계약은 완성되었다.
며칠 뒤, 집 안은 지극히 일상적인 연극 무대처럼 하나에서 열까지 순조롭게 준비되었다.
저녁 상에는 평소와 다른 수프가 놓였고, 아버지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농사 계획을 점검했다.
그러나 그 밤, 어머니의 눈빛은 사나웠고, 아버지의 손은 삽을 더 자주 만지작거렸다.
그들은 딸을 버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해결’을 위한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새벽이 밝자 그 선택은 행동이 되었다.
아버지는 삽을 들고 마리아를 밖으로 이끌었다. 마리아는 이해하지 못했다. 부모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집안의 공기는 이미 결정된 운명의 냄새로 가득 찼다.
새벽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바람에는 밤의 냄새가 남아 있었고, 마당의 돌 위에는 서리가 얇게 내려앉아 있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마른 가지가 바스러졌다.
아버지는 말없이 삽을 들고 서 있었다. 손끝에는 오래 묵은 체념이 스며 있었고, 등 뒤로 드리운 그림자는 무언의 죄를 끌고 가는 형벌 같았다.
마리아는 맨발에 천 조각을 감아 신발을 대신했다. 흙의 냉기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풀잎의 이슬이 발등을 적셨다. 해가 뜨기 전의 하늘은 푸르스름하게 젖어 있었고, 몇 개의 별빛이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새벽의 공기는 젖은 빵처럼 묵직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이 얼어붙는 듯했다.
밭은 단단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그 단단함이 발목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졌다.
아버지는 삽을 내리꽂았다.
흙이 갈라지며 내는 소리는 오래된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여기부터.”
그의 목소리는 명령이라기보다 무너진 자존심을 붙잡는 마지막 암시처럼 들렸다.
마리아는 삽을 들었다. 거친 나뭇결이 연한 손바닥을 스쳤고, 금세 살갗이 벗겨져 피가 맺혔다. 첫 삽질이 끝나기도 전에 어깨가 떨렸고, 팔뚝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흙먼지가 바람에 섞여 얼굴을 스쳤다. 흙냄새와 땀냄새가 뒤엉켜 코를 찔렀고, 혀끝에는 짠맛이 돌았다.
“조금 더.”
아버지는 고개를 숙인 채 낮게 말했다. 위로가 아니었다. 두려움을 삼키는 사람의 독백 같았다.
그 두려움은 딸이 아니라 세상의 조롱과 부끄러움, 그리고 그것을 견디지 못할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다.
햇빛이 머리 위로 오르자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열기와 땀 냄새가 뒤섞여 공기가 눅눅했고, 숨조차 고통이 되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허리춤을 적셨다. 시야가 열기 속에서 출렁였다.
바람이 멎자 귀 안쪽에서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 또렷하게 울렸다.
그때, 배 안에서 아기가 움직였다.
작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고통 속에서도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신의 신호처럼 느껴졌다.
마리아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아가야, 괜찮아… 조금만 더 참자, 우리….”
속삭임은 바람에 흩어졌고, 남은 것은 뜨거운 숨뿐이었다.
태양이 정수리에 이르자 마리아의 몸에 미열이 몰려왔다. 시야가 하얗게 번졌고, 무릎이 꺾였다. 흙먼지가 다리에 들러붙고, 손가락 틈으로 진흙이 스며들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안에서 흙맛이 돌았다.
“아버지… 잠깐만… 조금만… 쉬면….”
목소리는 타는 듯 가늘었다.
아버지는 삽을 멈추고 딸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연민, 부끄러움과 자책이 뒤얽혀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해가 질 때까지… 그때까지 계속해! 멈추지 마!”
그 거친 목소리는 자신에게 내리는 형벌 같았다.
오후 해가 기울 무렵, 마리아의 숨은 잦아지고 불규칙해졌다.
갈비뼈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 때마다 몸이 쪼그라드는 듯했고, 그때마다 배 속의 생명이 조용히 반응했다.
손바닥의 물집은 이미 터져 피가 흘렀고, 흙 위의 피자국은 작은 상처처럼 어둡게 번졌다.
그 순간, 속이 갑자기 뒤틀렸다. 마리아는 입을 막았으나 피 섞인 위액이 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침에 먹은 어머니의 수프 향도 함께 올라왔다.
붉은 얼룩이 흙 위에 번졌고, 냄새가 열기와 섞여 공기를 더욱 탁하게 만들었다.
“하… 느님… 흑… 흑….”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온 이름은 간절함보다는 절망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삽을 세워둔 채 멈춰 섰다.
마리아가 바닥에 쓰러져 붉은 피를 토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본 뒤에서야 들고 있던 삽을 내려놓았다.
그의 검은 그림자는 마리아가 쏟아낸 붉은 얼룩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눈동자가 흔들렸으나, 그는 다시 각오를 다지듯 삽을 들었다.
“조금만 더…! 일어나! 어서!”
그 말은 이제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해가 산등성이 뒤로 넘어가자 밭은 적막에 잠겼다. 귀뚜라미 소리가 낮게 깔렸고, 공기 속에는 서늘한 냄새가 돌았다.
마리아는 더는 일어설 수 없었다. 흙 위로 천천히 쓰러지며 두 팔로 배를 감쌌다.
“아가… 견뎌내야 해. 엄마 여기 있어….”
관자놀이 아래에서 미세한 맥이 뛰었다. 하늘은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어머니가 끓이던 수프의 매운 냄새가 사신의 환영처럼 되살아나 마리아의 주변을 맴도는 듯했다.
혀끝에는 독한 쓴맛과 짠맛이 번졌다.
눈가에 고인 땀과 피눈물이 하나로 섞여 있었다.
시간은 멈춘 듯했다.
그 정적 속에서 오직 생명의 미세한 두드림만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제야 삽을 내려놓았다.
짧은 금속성 소리가 돌처럼 떨어졌다. 그의 어깨가 아주 조금 주저앉았다.
그 안에는 고백도, 위로도, 용서도 없었다.
그는 딸을 부축하지도 않았다. 대신 천천히 앞서 걸었다.
마리아는 그 발소리를 따라 한 걸음씩 걸었다. 다리가 떨렸고, 가슴 안에서는 아직 식지 않은 불길이 잔잔히 타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에 길고 얇게 찢겨 달라붙었다.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차갑고 어두운 아버지의 그림자뿐이었다.
두 그림자는 서로 기대고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사랑도 존경도 자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 그림자는 붙어 있으면서도 서로를 철저히 외면했다.
대문을 닫는 순간, 어머니가 마당을 쓸고 있었다.
빗자루 끝에서 먼지가 일었다. 그녀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씻고 들어가라.”
그 말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마리아는 씻을 물이 담긴 대야 앞에 앉았다. 손을 담그자 물이 빠르게 탁해졌다.
손목의 상처가 쓰렸고,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어깨가 저릿했다.
그때, 배 속의 아이가 아주 낮게, 그러나 분명히 반응했다.
살아 있음을 알리는 조용하지만 또렷한 두드림이었다.
마리아는 두 손으로 배를 조심히 감싸며 눈을 감았다.
귓속이 고요해지고, 그 고요가 온몸으로 번져갔다.
밤이 되자 집은 바람막이처럼 굳게 닫혔다.
등잔불이 낮게 흔들리며 벽 위의 그림자를 떨게 했다.
어머니의 발소리가 부엌에서 멈췄고, 아버지의 기침이 어둠을 스쳤다.
마리아는 차가운 흙벽에 등을 붙이고 조용히 기도했다.
“아도나이, 제가 이 아이를 끝까지 품겠습니다.
설사 세상이 저를 버리더라도, 저는 이 생명을 절대 버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침묵하셔도, 저는 듣겠습니다. 침묵의 안쪽에서 당신의 사랑을….”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아주 미세한 모래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마당을 건너 대문과 방문 사이 그 얇은 어둠을 조심스럽게 지나오고 있었다.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숨을 고르는 기척.
등잔불의 심지가 길어지며 그림자가 흔들렸다.
“마리아… 마리아….”
낮고 쉰 목소리.
부서진 돌을 손끝으로 쓰다듬는 듯한 거친 온도.
그 이름이 불린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마리아의 눈이 순식간에 젖었다.
등잔불 뒤편, 어둠의 윤곽이 서 있었다.
그는 바로 요셉이었다.
문턱에 닿은 그의 손이 떨렸고, 밤바람이 불꽃을 낮게 눕혔다.
마리아는 몸을 일으켜 배를 감싸 안았다. 심장은 두 생명의 박자로 뛰었다.
“어서… 어서 들어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닫힌 겨울 물가처럼 얇았지만, 마음의 중심은 무너지지 않았다.
요셉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살에 잠시 기댄 그의 이마는 기도의 자세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날 밤, 마리아의 밤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방문은 조심스러운 숨결처럼 조금씩 요셉을 향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