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확실한 행복을 담아낼 줄 아는 식집사 소현의 이야기.
늘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식물을 보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이 조그마한 것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을 보며 단조로운 일상의 감사함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건축사사무소에서 일 하는 소현은 월급을 식물을 사는 데 모조리 써버릴 만큼 식물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2년 차 식집사입니다. 심리적으로 힘이 들었던 시기, 식물로 마음을 돌봤던 경험으로 지금까지 식물들을 키우고 있다는 그는 취미를 통해 또 다른 꿈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지런하지만 소란스럽지 않게 움직이는 식물들처럼 느리지만 확실한 행복을 담아낼 줄 아는 식집사 소현. 그의 일상 속 영글어가는 행복과 좋아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안녕하세요! 소현님.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2년째 식물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옥상정원과 온 집안을 화분으로 채우는 중인 초보 가드너입니다. 귀여운 강아지를 꼭 안고 노래를 들으며, 초록이들에게 둘러싸여 생각에 잠기는 것을 매우 좋아하지요. 사실 식물 키우는 것은 취미라 볼 수 있고, 직업은 따로 있어요. 대학교에서 5년 동안 건축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노들섬을 설계한 MMK+라는 건축사사무소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하며 배워가는 중이랍니다.
흔히 건축 재료로 콘크리트와 같은 흙, 유리, 메탈, 플라스틱과 같은 ‘무생물’이 쓰이잖아요. 그렇지만 건축물 속에 들어가 하루하루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살아있는 ‘유생물’이기에 살아있는 자연을 건축 설계 단계에서 하나의 중요한 재료로 인식한다면 공간을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건축 공간과 자연이 얼마큼 조화롭게 만나 우리의 일상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월급을 받으면 거의 다 식물을 사는 데에 쓰일 정도예요. 하하.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슬슬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요. 지금이 가드닝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바쁜 시기인데요. 동면에서 갓 깨어난 수국과 튤립, 무스카리들이 폭풍 성장을 하고 있어서 매일매일 달라지는 모습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동면 없이 따뜻한 거실에 있던 다른 식물들도 성장 새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 틈틈이 물을 주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작년 가을에 구근을 캐서 보관하고 있었던 디알리아를 꺼내 겨울 동안 말라죽지는 않았는지 점검을 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여기저기서 받아 모아놓은 씨앗이 정말 몇 백개 정도 되는데, 얼른 파종 준비를 해야 하고요.. 또, 최근에 구매한 희귀 식물인 '퓨전 화이트'와 '필로덴드론 글로리오섬'이 잘 자라도록 온실을 자주 관찰해야 하는 저만의 숙제가 생겼네요. 얼른 대품으로 키우고 싶어요. 아차차. 그리고 제일 중요한 계획이 있는데요.
제일 중요한 계획이요! 빠트리면 안 되죠. (웃음)
옥상정원의 온실을 만드는 작업을 이번에 끝내려고 해요. 작년 11월부터 시작했던 작업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봄이 오기 전에는 꼭 완성하고 싶어요. 제가 좀 게으르거든요. 그래도 거의 마무리 단계인 실리콘 코킹과 최종 조립을 남겨두고 있답니다. 이쁜 문 손잡이도 샀는데 얼른 완성해서 식물들로 채우고 싶어요.
할 일들이 줄줄 생기는 바쁘고 정신없는 요즘이지만 옥상과 온실, 그리고 저의 방에 곧 생길 싱그러운 식물들의 모습을 기대하며 매우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취미에 대한 애정이 한가득인 게 느껴져요. 식집사 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제가 식물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것은 딱 2년 전 이맘때인데요. 그 전에는 취미라고 할 것이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학교 과제하기 바빴고, 가끔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거나, 시끌시끌하게 울고 웃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죠.
가끔 배드민턴이나 수영, 클라이밍 등을 시도하기는 했는데 꾸준히 할 만큼 흥미는 없었어요. 그러던 중 우연히 유주 나무를 선물 받아 처음으로 식물을 키우게 됐는데, 식물 키우기를 통해서 나 혼자서도 고요하고 건강하게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덕분에 코로나로 인한 답답한 시기를 잘 극복하고 견딜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전문가나, 고수분들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지만요.
식물을 키우면서 얻게 되는 것들도 참 많을 것 같아요.
맞아요. 식물에게 배울 점이 참 많아요. 늘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이 조그마한 것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을 보며 단조로운 일상의 감사함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식물을 키운 후부터 매일매일 달라지는 식물의 모습에 내일이 기대되기 시작한 거 있죠. 다음날 아침, 새롭게 자라 있을 새싹이나, 풀잎이 기대돼서 아침 일찍 눈이 떠지거든요. 성인이 되고 난 후로, 신기하다는 감정을 느낄 일이 거의 없었는데, 식물들의 움직임과 식물을 찾아오는 곤충들을 보며 신기하고 경이로움을 느껴요. 식물들의 우아한 몸짓에서 은은하고 잔잔한 행복을 알게 됐어요.
감사와 행복. 곁에 있어도 알아차리기 어려운 감정들이잖아요.
맞아요. 그리고 의외로 이득을 본 게 또 있는데요. 근육이 생기더라고요. (웃음) 아침 일찍 햇빛을 쐬게 하려고 화분을 이리저리 옮기다 보면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데 그러면서 몸에 근육이 붙는 것을 느꼈어요. 진짜 웃기죠? 작년에 한창 하던 필라테스를 6개월 정도 쉰 적 있는데, 그 쉬는 6개월 동안 온실도 만들고 식물들을 정말 열심히 돌봤거든요. 옥상까지 매일 물 10L씩 계단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나르고요. 그래서 그런지 다시 필라테스를 시작하려고 인바디를 측정해보니 몸무게는 그대로인데, 근육량이 2KG이나 늘어있는 거예요! 필라테스보다 더 효과가 좋은 운동이더라고요. 식물을 돌보면서 정신과 육체 건강 모두 좋아지니 굉장히 뿌듯하고 기분 좋아요.
지금 식집사 취미와 지금 업으로 삼고 있는 건축학을 서로 합하면 신선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후에 취미를 통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으신가요?
며칠 전 친구랑 약속을 한 게 있어요. 35살 전까지, 우리만의 회사를 만들거나, 아니면 공간을 매매해서 우리만의 공간을 꾸미자고요. 그게 스튜디오든 카페든 뭐든지 좋으니까 일단 해보려고요.
요즘은 특색 있는 렌털 스튜디오나, 카페, 에어 비앤비 같은 공간이 워낙 많잖아요. 이런 흐름도 언젠가는 변하고, 사라질 수 있겠지만 유행을 타지 않는 어떤 공간의 ‘OWNER’가 되고 싶어요. 조경과 건축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유행이나 취향을 넘어서 원초적으로 아름답고, 편안한 공간을 생각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네.. 맞아요. 아직은 막연하고 두리뭉실하답니다. 많이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요즘은 세상이 워낙 휙휙 바뀌어서 그 공간이 메타버스일 수도 있겠네요.. 응원해주세요. 하하.
조경과 건축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사람! 멋진데요. 그러고 보니 지금 작업 중인 '식물 온실'이 작년 중랑구 청년활동 지원사업 <1934 청년시대>를 통해 시작하게 되셨다고요.
네. 지난 <1934 청년시대> 활동은 주로 옥상에 둘 온실을 만드는 것에 초점을 맞춰 진행했어요. 스케치업으로 *COLD FRAME을 모델링해보다가, 더 욕심이 생겨 아예 미니 온실을 계획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처음 해보는 것들이라 매 과정이 제게는 큰 산이었어요.
부자재를 재단하기 위해 을지로를 참 많이 돌아다녔는데, 체구도 작고, 어리고 미숙한 여자 손님이라 그런지 사장님들이 은근히 무시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질문을 너무 많이 하니까 “까다롭고 욕심 많은 아가씨”라며 약간 혀를 끌끌 차는 사장님도 계셨어요. 처음에는 디자인만 제가 하고 목공은 맡기려 했는데, 괜히 자극받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직접 해내고 말겠다고 다짐했죠. 오히려 그분들 덕분에 오기가 생겨 끝까지 할 수 있었어요.
솔직히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정말 98번 있었거든요.. (웃음) 작업 도중에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를 느꼈던 적도 많고요. 그럴 때마다 '아, 애초에 온실을 만드는 게 아니었어.', '조립을 먼저 하는 게 아니었다고' 같은 신세한탄도 많이 했죠. 그렇지만 마냥 탓만 할 순 없으니 얼른 대책을 마련해서 해지기 전에 작업을 마무리해야 했어요. 닥친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해 앞으로 나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죠. 정말 산 넘어 산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활동이었던 거 같아요.
*COLD FRAME : 식물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막아주는 프레임형 가구
늘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식물을 보며 스스로를 되돌아보기도 하고, 이 조그마한 것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을 보며 단조로운 일상의 감사함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지금까지 소현님이 하고 싶은 일들을 이끌어 나갔던 힘은 무엇인가요?
‘호기심’이라고 생각해요. 호기심이 많아서 한 가지만 하는 것을 잘 못하고 이것저것 일을 벌이는 경향이 있거든요. 이건 그냥 저의 타고난 기질인가 싶은데, 어릴 적부터 좀 많이 부산하고 산만했대요. 그런 애 있잖아요. 야무지기는 한데 지나치게 활동적이고 여기저기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말썽쟁이. 맨날 동네 남자애들이랑 어울리면서 발바닥 새까매져서는 저녁때가 지나도 안 들어오는 그런 왈가닥 여자애.. 그게 저였어요. 지금은 그런 에너지가 많~이 죽었지만 그 호기심이나 활동성은 남아있는 듯해요. 그래서 저는 이것저것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을 좋아하나 봅니다.
소현님의 동력이 호기심이라면, 일상 속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도 남다를 것 같아요.
제 일상의 우선순위는 ‘나의 행복, 나의 자존감’ 이에요. 사실 심리적으로 많이 방황하고 힘들었을 때 식물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그때 식물에게 치유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지금까지 식물을 꾸준히 돌보게 됐고요. 옥상정원을 관리하다 보면 허리가 아프고 얼굴이 까맣게 탈 정도로 몸이 고생스럽지만 행복해요. 보람 있고.
업무를 할 때에도 이 공간을 찾는 사람은 과연 행복할까? 이동하기에 편안할까? 하는 생각으로 설계하는데, 결국 건축도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거라고 생각해요. 도시의 행복. 시대의 행복. 행복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아요. 어느 순간 제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느끼면 그게 무엇이든 그냥 그만둘래요. 그리고 도망칠래요.
마지막으로, 소현님이 꿈꾸는 앞으로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냥 묵묵히 나아가는 사람이고 싶어요. 식물처럼 조용하고 부단히 행동하는 사람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의 미래 모습이나 노력해야 할 방향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러기가 겁나더라고요. 실제로 말한 것을 다 지키지 못하기도 했고요. 이제는 철이 들은 건지 겁쟁이가 된 건지, 조금 사려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하하
그래서 이제는 말뿐이 아닌, 보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묵묵히 공부하고, 고민하고, 연습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그러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저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선뜻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소현의 부지런한 식집사 생활이 궁금하다면
☞소현의 추신
지금은 인스타그램 계정이 많이 허전하지만 곧 봄이 오고 사진 찍는 재미가 쏠쏠해지면
열심히 포스팅할게요. 조만간 활발히 기록할 예정이니까 기대 많이 해주세요!
❇2022.02.25
청년들의 다양한 삶을 조명합니다. 내 주위 가까이, 삶의 근육을 기르는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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