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오후, 회사 근처 카페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에어컨 바람이 땀에 젖은 셔츠를 스치는 순간, 온몸의 모공이 일제히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카운터에 서서 물 한 잔을 부탁했다. 스물다섯쯤 되어 보이는 바리스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투명한 유리잔에 물을 따르기 전, 먼저 얼음 서너 조각을 집어넣었다. 찰칵, 찰칵. 얼음이 유리벽을 스치며 내려앉는 소리가 묘하게 맑았다. 나는 얼음을 달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밖에서 들어온 내 이마의 땀방울과 붉어진 볼, 그리고 어깨에 축 늘어진 가방끈이 이미 충분히 말하고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종이컵 대신 유리잔을 건네받으며 짧게 인사했다. 첫 모금을 삼키는 순간, 차가움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몸의 열기가 식는 것과 동시에 마음속 무언가도 함께 가라앉았다. 새벽 5시에 확인한 거절 메일부터 시작된 하루였다. 3개월 동안 준비한 프로젝트가 최종 단계에서 무산됐다는 내용이었다. 점심시간엔 상사가 "네가 좀 더 신경 썼으면 이런 일 없었을 텐데"라는 말을 덧붙였다. 사실 내 잘못은 아니었다. 클라이언트의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이었지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네, 다음엔 더 잘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모든 무게가 얼음물 한 잔과 함께 조금씩 녹아내렸다. 때로 친절은 말이 아닌 온도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 온도가 굳어있던 마음을 풀어준다.
창가 자리에 앉아 잔을 내려놓으며 문득 3년 전 여름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여름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뒤 한동안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그때 옆집 할머니가 매일 아침 문 앞에 시원한 매실차를 놓고 가셨다. "더운데 이거라도 마셔"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한 달 동안 계속된 그 작은 배려가 나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했다. 오늘 이 낯선 바리스타의 얼음도 그때와 닮아있었다. 누군가의 더위를, 갈증을, 지침을 먼저 알아차리고 조용히 채워주는 마음.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아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었다.
잔을 반쯤 비우고 나니 신기하게도 마음의 결이 달라져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미뤄두었던 친구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요즘 어떻게 지내?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바로 답장이 왔다. "헐, 나도 막 너한테 연락하려던 참이었어!" 우연의 일치였지만, 아니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이어서 오전에 받은 거절 메일에 답장을 썼다. 전에는 "네, 알겠습니다"로 끝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더 좋은 제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똑같은 거절이지만, 마침표가 아닌 쉼표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택배 기사님이 들어왔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카운터에서 시원한 음료를 주문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내 앞의 얼음물을 떠올렸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는 그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얼음 더 필요하시면 제 거 드릴게요. 저는 이제 충분히 시원해졌거든요." 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환하게 웃었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비록 거절당했지만, 그의 미소가 또 다른 시원함을 전해줬다. 우리가 받은 온기는 자연스럽게 흘러넘친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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