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계산대 앞, 페트병 하나를 들고 서 있다. "봉투 필요하세요?" 직원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간단한 거래다. 그런데 계산을 기다리며 문득 깨닫는다. 오늘 하루 내가 삼킨 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아침 회의에서 "그 방향은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하려다 멈춘 순간. 점심시간에 "혼자 먹을게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따라나선 발걸음. 퇴근 시간, "먼저 가세요"라는 인사 뒤에 숨긴 "나도 같이 가고 싶어요"라는 속마음. 이 모든 말들이 내 안에 쌓여간다. 마치 은행 계좌의 복리처럼, 침묵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무게를 늘려간다.
복리를 '인류 최대의 발명'이라 부른 것처럼, 침묵의 축적도 놀라운 힘을 갖는다. 원금에 이자가 붙고, 그 이자에 또 이자가 붙듯이, 오늘 하지 못한 말 위에 내일의 고요가 쌓인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더 이상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조차 잊게 된다. 침묵의 복리는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고갈시킨다. 하지만 여기에 흥미로운 역설이 숨어있다. 바로 이 축적된 무언이 때로는 창조의 원천이 된다는 것.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이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내 경우도 그랬다. 회사에서 하지 못한 말들이 저녁의 일기가 되고, 친구에게 전하지 못한 위로가 블로그 글이 되었다. 무언의 압력이 다른 형태의 표현을 찾아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직접 소통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침묵이 완전한 무(無)는 아니라는 증거다. 때로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게 되는 순간들. 그것이 인간 소통의 아이러니다.
지난주 택시 안에서의 일이다. 기사님이 "오늘 날씨 좋네요"라고 말을 건넸다. 나는 "네, 그러네요"라고 답했다. 창밖엔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우리 둘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날씨'는 기상 정보가 아니라 '대화를 시작하고 싶다'는 신호였고, 내 '그러네요'는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는 응답이었다. 실제 날씨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완벽하게 소통했다.
이런 일상의 번역 작업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밥 먹었어?"가 실제 식사 여부를 묻는 게 아닌 것처럼, 우리가 주고받는 대부분의 말에는 이중 삼중의 의미가 담겨있다. "바쁘시죠?"는 '당신이 그리워요'일 수도, "피곤해"는 '위로해 줘'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 번역 코드를 서로 다르게 갖고 있다는 것.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사전으로 말하면서, 상대도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으리라 믿는다.
더 흥미로운 건, 같은 사람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다른 코드를 쓴다는 점이다. 월요일 아침의 "힘내"와 금요일 저녁의 "힘내"는 전혀 다른 온도를 지닌다. 부모님께 하는 "잘 지내요"와 친구에게 하는 "잘 지내"도 다른 진실을 담는다. 이런 미묘한 차이를 읽어내는 것, 그것이 진짜 소통 능력이다. 때로는 완벽한 오해가 불완전한 이해보다 나을 수 있다. 적어도 오해는 연결을 시도했다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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