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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의 무게를 내려놓다

by COSMO

좋은 사람이라는 감옥


밤 열한 시, 모니터 불빛만이 방 안을 얇게 덮었다. 막 보낸 메일의 마지막 문장이 화면에 떠 있었다. "네, 내일까지 수정해서 보내드릴게요." 이미 세 번째 수정이었고, 계약서 어디에도 없는 요구였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떨렸다.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아니, 거절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마치 몸에 새겨진 프로그램처럼, '좋은 사람'이라는 코드가 자동으로 실행됐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맞은편 아파트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져가고 있었다. 모두가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나만 아직도 누군가의 기대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책상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다시 켰다. 파일을 열기 전, 잠시 멈췄다. 거울처럼 까만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니요'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무거워진 것이. 어린 시절부터 들어온 말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착한 아이네." "배려심이 깊어."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사람." 그 말들은 칭찬이었지만, 어느새 나를 가두는 감옥이 됐다. 타인의 실망을 두려워하며 살아온 시간들. 그 두려움은 나를 '좋은 사람'이라는 가면 뒤에 숨게 만들었다. 거절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먼저 나를 사랑해야 남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진짜 내 감정은 늘 미뤄졌다. '나중에 화내자', '나중에 거절하자', '나중에 내 의견을 말하자'. 그런데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았다.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수정을 마쳤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어깨가 축 늘어졌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충혈된 눈, 굳은 표정, 그리고 입가에 억지로 그려진 미소의 흔적. 이것이 내가 선택한 '좋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 분노는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거절하지 못한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거절하는 것보다 자신의 욕구를 거절하는 데 더 익숙하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오랜 습관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마치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처럼, 거절은 연습이 필요한 기술이었다.


거절의 첫 연습


다음 날 아침, 커피를 마시며 어제 주고받은 메일들을 다시 읽었다. 상대방의 요구는 점점 늘어났고, 내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네, 가능합니다." 그 짧은 문장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희생됐는지 이제야 보였다. 운동 시간, 친구와의 약속, 읽고 싶던 책,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위한 휴식. 이 모든 것들이 타인의 편의를 위해 조용히 사라졌다. 텅 빈 사람은 아무것도 줄 수 없다. 먼저 나를 채워야 남에게도 나눌 수 있다. 마치 가지치기를 당한 나무처럼, 내 삶은 점점 앙상해져 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더 많이 양보할수록, 상대의 요구는 더 당연해졌다. 감사는 사라지고 당연함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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