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글 앞에서 자주 멈춘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이 예전과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해서다. 익숙하게 쓰던 문장들이 어느 순간부터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손은 키보드 위에 있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상태가 불안했다. '슬럼프인가?' '재능이 고갈된 건가?'
하지만 며칠, 몇 주를 지나며 이 멈춤이 다른 의미라는 걸 알게 됐다. 멈춘 게 아니라 멈추는 중이었다. 이 작은 차이가 모든 걸 바꿔놓았다. 멈춘 상태는 정지지만, 멈추는 중이라는 건 전환기다. 무언가가 끝나고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되기 전—그 짧은 순간.
브런치에 글이 뜸한 동안, 나는 완전히 쉬고 있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썼다. 쓰다 지우고, 다시 쓰다 또 지우고. 노트북 폴더 안에는 완성되지 못한 초고들이 수십 개 쌓여 있다. 어떤 밤은 새벽까지 앉아 한 줄도 건지지 못하고 끝났다.
작년 이맘때였나. 밤 11시에 책상에 앉아 새벽 4시에 일어났는데, 빈 화면만 깜빡이고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시간을 '실패한 시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본다. 이 시간들이 쓸모없었던 건 아니다. 그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글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이제껏 나는 책을 읽고, 분석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글을 써왔다. 독서 에세이, 비평, 사유의 전개—이런 게 내 영역이었다. 『비교리즘』도 그런 방식으로 썼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방식으로는 담을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작년 가을, 친구와 이별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10년 연애 끝에 헤어졌고, 그 순간을 나한테 설명하려 했다. "그냥... 공기가 달라졌어. 말로는 설명이 안 돼."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알았다. 어떤 이별의 순간은 분석적인 문장으로는 그 공기를 담을 수 없다는 걸.
누군가의 결정을 논리로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그 내면의 미세한 떨림은 개념으로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전혀 다른 형식을 생각하고 있다. 설명하는 대신 보여주는 글. 분석하는 대신 느끼게 하는 글. 구체적으로 어떤 장르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소설이 될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형식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거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다루게 될 거라는 예감. 그리고 그 예감이 나를 겁나게 하면서도 설레게 한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다. 익숙한 걸 내려놓는다는 건 불안한 일이다. 잘하던 걸 멈추고 아직 잘 못하는 걸 시작한다는 건, 스스로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비유하자면 이런 느낌이다. 피아노를 치던 사람이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한 것 같다. 건반을 누르는 게 아니라 현을 그어야 한다. 완전히 다른 감각, 다른 근육이 필요하다. 처음엔 소리도 제대로 안 난다.
하지만 동시에 이게 맞는 방향이라는 확신도 있다. 그 확신의 근거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몸이 먼저 안다고 할까.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브런치에 글이 뜸해지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독자들이었다.
작년 12월쯤, 한 독자가 메시지를 보냈다. "요즘 글이 안 올라와서 궁금했어요. 괜찮으신가요?" 그 짧은 메시지를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떤 요구도 하지 않지만, 조용히 기다려주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솔직히 말하면, 미안하다. 일정한 리듬으로 올리겠다고 암묵적으로 약속했던 그 흐름을 지키지 못해서.
하지만 동시에 이것도 알게 됐다. 조급하게 쓴 글은 금방 티가 난다는 것. 의무감으로 채운 문장은 독자도, 나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건 '해야 할 말'이 아니라 '해야 한다고 느끼는 말'이다. 그 둘의 차이는 미묘하지만 결정적이다. 전자는 내면에서 나오는 필연이고, 후자는 외부에서 부과된 의무다. 나는 후자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독자와 나의 관계를 다르게 정의하는 것. 우리는 공급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함께 천천히 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성급한 결과보다 제대로 된 과정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라고.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라, 상대에게 여유를 선물하는 일이다. 그 여유 속에서 나는 지금, 더 깊은 곳을 파고 있다. 언젠가 그 결과를 보여드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지금 나는 절반쯤은 겁먹은 상태다.
새로운 형식의 글을 쓴다는 게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다. 이제껏 쌓아온 노하우가 거의 쓸모없어지는 느낌이다. 비평적 글쓰기에서 잘 작동하던 도구들이 여기서는 무디다.
한 달 전쯤, 지인과 커피를 마시다 이 이야기를 했다. "형식을 바꾸는 게 이렇게 힘든지 몰랐어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넌 지금 초보자야. 다시 배우는 거잖아."
맞다. 나는 지금 초보자다. 분석적 글쓰기에서는 전문가였지만, 이 영역에서는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불안 속에 묘한 기대도 있다. 엔지니어에서 작가로 전환할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지만, 그 낯섦이 결국 『비교리즘』을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런 것 같다. 불안하지만 동시에,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직감이 있다.
겁먹은 상태와 기대가 공존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게 정상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전환 앞에서는 늘 이런 감정들이 뒤섞인다.
이 글은 계획 발표도, 화려한 선언도 아니다.
그냥 "나 아직 여기 있다"는 신호다. 조용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고, 아직 포기하지 않았고, 조만간 다시 글로 돌아올 거라는—그런 정도의 메시지.
다음에 브런치에 올라올 글이 정확히 무엇일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연재의 첫 회일 수도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형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건 이 멈춤의 시간을 오래 지나온 결과일 것이고, 쉽게 쓴 글은 아닐 거라는 것.
느린 리듬으로 쓰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믿고 싶다. 빠르게 양산하는 대신, 천천히 깊이 파는 사람. 자주 올리는 대신, 제대로 된 걸 올리려는 사람.
여기까지 읽어준 당신이라면, 아마 다음에 내가 무엇을 쓰든 함께해 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믿음이 있어서, 나는 아직도 책상 앞에 앉는다.
느리지만, 다시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