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치치 May 19. 2022

할머니의 전화번호부

in 스마트폰

어릴 때만 해도 집에 전화번호부라는 게 있었다.

유선 전화기 옆, 할머니나 엄마의 글씨체로 주변 사람들 혹은 세탁소나 배달 식당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책자.

할머니는 가끔 그걸 펴서 추가를 하고, 번호가 바뀐 사람들이나 더는 전화를 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목록을 수정 혹은 삭제했다. 이제 유선 전화기는커녕 스마트폰과 카카오톡의 시대가 되었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전화번호들을 관리한다.

할머니의 전화번호들이 책자에서 핸드폰으로 넘어오면서 입력은 나의 몫이 되었지만.


이번 주말, 오랜만에 할머니를 만났다. 큰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며 우리 집에 하루를 머물다 가셨다.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전화번호부 정리의 시간이다. 나는 이 일에 익숙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해 온 일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이름을 하나씩 말하면서 이건 단축키 몇 번으로 옮기고, 이건 지워라. 하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ㅇㅇㅇ 지우는 거 맞지? 하고 묻고, 할머니는 확인을 해준다. 어. 얘는 죽었어. 혹은 얘는 치매라서 전화 못 해.


점점 추가와 수정보다 삭제가 많아지고 있다.

할머니는 담담한데 괜히 혼자 나만 싱숭생숭해서 그날 잠을 설쳤다.

할머니가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준다.


작가의 이전글 drive my ca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