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른이 된걸까? 요즘 내 머리를 빙빙 도는 질문 중 하나다. 법이 이르는 18세 부터일까?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결혼을 할때 부터? 그것도 아니라면 무한한 책임을 지는 부모가 될때 부터? 추상적이니 정의도 다양할테다. 내게도 여럿이 있고, 최근에 생긴건,
"나하나 구제하지 못하는 영웅임을 자각한 순간."
어린 시절 어려웠다. 가졌다 빼앗겼을 때 상실감이 더 크듯, 잘 살다 어려운 집안 장남으로 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IMF는 피한 우리 집이지만 사람 생각처럼 안 되는게 사업인 모양이다. 아버지가 꾸려가던 사업을 망가졌고, 우리 집은 힘들어졌다.
주민등록 초본을 떼면 앞뒤고 빽빽하게 거주지가 기록된다. 거처 없이 떠돌았다. 그때 난 드래곤볼을 보며 영웅이 되리라 생각했고, 자서전을 보며 위인이 되리라 결심한 모양이다. 어려움에 봉착한 아버지를 한 번에 구해줄 능력을 가진 영웅. 불안해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어머니를 구제할 영웅. 학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동생을 구원할 영웅.
영웅은 직업이 되기도 했다. 경찰이 되기도 하고, 한의사가 되기도 했으며, 박사이기도 했다. 에디슨 처럼 숱한 발명가로 연구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이를 상상하기도 했고, 불굴의 의지로 우뚝 선 이순신 장군이 되기도 했다.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고등학생이 되며, 깨달았다.
'난 나 하나 구제하지 못하는구나.'
고등학생들 전형적인 패턴이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이른바 SKY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가 아니면 포항공대나 카이스트에 가겠노라 가볍게 말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 서성한 (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로 이어지는 대학에는 가겠다며 의지를 불태운다. 그러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현실을 자각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이면 충분하다 부르짖는다.
비슷했다. 난 특출나게 공부를 잘하는 것도, 특별하게 좋아하고 천착하는 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위인들이 했던 불굴의 의지은 커녕, 영어 듣기를 잘듣지 못했다고 마음이 동동거리는 평범한 학생임을 알게 된다.
아버지를 한번에 구해주지도, 어머지를 구제할 수도, 동생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팍팍한 현실을 마주했다. 이때, 난 어른이 되었다 생각했다. 곰곰 생각해게 되었다. 영웅이 아닌 나. 돕기는 커녕 가족에게 의지만 하는 나. 겨우 자라 지금에 온 나. 구제는 커녕 구제불능.
가족을 둘러봤다. 상황은 나쁘지만, 각자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눈물 겹고, 때로운 가슴이 먹먹한 상황에서도 묵묵하게. 감히 내가 그분들을 구원한다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이때 오히려 그들이 영웅성 한 조각을 가진 분들임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동생도.
가족이라는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부터 구제해야한다는 생각에 닿았다. 그렇게 우뚝 서있으면, 가족이 가끔 기댈 수 있는 단단한사람이 되리라는 다짐. 이제야 어른이 된건 아닌가 싶다. 지금도 난 여전히 자주 가족에게 기댄다. 곧 그들이 내게 기대어 쉬어가길 바라며, 좀 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길 바라며. 스스로를 구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