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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수가없다

영화사<모호>작품, 박찬욱감독

by allen rabbit

<어쩔수가없다>에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몇 개의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딸 아이의 그림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점들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아이만의 악보였다. 또 유난히 자주 나오는 전지적 뷰이다. 지붕의 세모 칸으로 아들과 엄마는 마당을 굽어본다. 그리고 만수는 화분을 치켜들고 경쟁자를 굽어본다. 이렇게 사람은 세상을 특정한 틀로 바라보고, 그렇게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분재를 통해 주인공 만수와 아들을 비추는 장면이다. 아들이 분재를 바라본다. 분재가 클로즈업되고, 이번엔 아빠가 분재를 들여다본다. 그런데 분재 안에 아들이 있다. 놀란 아들이 손전등을 비춘다. 아빠의 얼굴에 손전등 불빛이 비춰진다. 만수의 아버지는 돼지 2만 마리를 살처분하고, 자기가 살기 위해 베트콩을 죽였다. 그리고 만수는 이것을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경쟁자를 제거하는 만수의 행위는 그의 아버지에서 만수로 그리고 아들에게로 이어진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아름답고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다. 감독만의 장면 대비와 줌인 기법도 여전하다. 만수와 아들이 동시에 범죄를 저지르고 경찰이 들이닥치는 것이나. 만수가 마지막 희생자를 죽이기 위해 땅을 팔 때 아내가 남편이 묻은 시신을 파내는 대비도 멋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는 시종 놀라운 음악적 재미를 선사한다. 조영욱 음악감독의 장점이 십분 발휘된 것 같다. 영화 속에 흐르는 음악들은 정말 “쨍”해서 화면이 빨간색일 때 음악이 파란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시각과 청각을 날카롭게 충돌시키며 각별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주인공 만수는 처음에는 해고는 살인이라고 새로운 오너를 향해 노조위원장처럼 외친다. 하지만 해고를 통고받자 가족에게 이 사실을 솔직하게 알리고 재취업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그러자 아내는 테니스를 그만두고 일을 나가고, 가족들에게 차와 가구를 팔고 집도 내놓는 대책을 내놓는다. 만수는 재취업을 사정하느라 화장실까지 쫓아갔다가 망신당하고, 치통은 계속 그를 괴롭힌다. 이런 상황은 짐 켈리 주연의 영화 <뻔뻔한 딕과 제인>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짐 켈리가 자신을 해고한 사업주에게 복수하는 것과 달리 만수는 자기 합리화 속에서 경쟁자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만수는 이것을 전쟁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만수는 아내가 인디언 옷을 입고 다른 남자와 춤을 추는 것은 못 견뎌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거침이 없다. 그는 해고된 뒤부터 자기 행동에 일종의 주문을 거는 행동을 한다. 손바닥에 해야 할 말을 적고,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행동 강령을 입력한다. 만수는 첫 번째 희생자인 구범모를 관찰하다가 뱀에 물리게 되는데 그때 구범모의 아내가 응급조치를 해 준다. 그녀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만수는 구범모의 아내가 한 말을 똑같이 아내에게 한다. 만수라는 인물은 오로지 자신의 예전 삶을 되찾겠다는 것 이외의 자기 주관은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렇게 자신의 가족을 위해 재취업하겠다고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리스크를 지려 하지만, 이 길이 맞는 길인지에 대한 질문은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있다. 어쩌면 만수의 잔인함은 타고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 상황을 전쟁이라고 보고 자신을 전쟁터의 병사로 보는 잘못된 주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구범모를 죽이는 첫 살인 씨퀀스는 <어쩔수가없다>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만수는 집에 몰래 들어가 구범모를 죽이려 하지만 구범모의 아내가 제지하면서 활극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 활극은 엎치락뒤치락 예상할 수 없게 흘러간다. 만수가 갑자기 오디오 볼륨을 크게 키우고 총을 감추려고 장갑을 몇 겹 씩이나 쓴 엉뚱함부터, 세 사람이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은 모두 우스꽝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웃기지 않다. 엉성하게 활극을 벌여서 웃기거나, 상황의 아이러니를 부각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연출 탓에 이 장면은 기이하게 개연성을 얻는다. 그래서 웃기지 않다. 구범모가 마침내 죽었을 때는 그렇다고 비극을 느낄 수도 없다.


차승원이 죽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달아나다 총에 맞는 장면은 익스트림 롱샷으로 처리되어 생사를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트렁크 밖으로 나온 그의 옷가지는 분명 서스팬스를 유발하는 장치지만 영화는 또 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이것이 영화 <어쩔수가없다>의 어쩔 수 없이 “모호”한 지점이다.


만수가 재취업하기 위해 ‘어쩔 수가 없이’ 살인을 택하는 이야기라면 어처구니없는 소동극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영화는 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만수의 선택도 남편의 시체 유기를 아들과 아내가 모른 체 하는 것도 영화는 모두 “어쩔 수가 없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 노동자를 해고하고, 그래서 노동자들끼리 서로 죽이게 만드는 이 모순의 사회 구조를 직접 비판하지도 않는다. 도리어 만수의 중산층으로의 복귀 욕심과 그의 근시안적 세계관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듯하다. 때문에 만수가 AI 때문에 혼자 공장에 남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모두 “어쩔 수가 없다”라는 변명처럼 보인다.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이렇게 “모호”한 영화다.


하지만 이런 의문과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회적 모순과 구조를 들여다보려 할까? 우리는 나보다 더 잘나가는 누군가를 탓하고, 못난 자신을 탓하는 만수 같은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모순의 원인을 쫓기보다 내 자리를 차지한 저들에 대한 질투와 비난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까? 만수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관점을 주문처럼 머릿속에 집어넣고 살지는 않을까. “사실 나야말로 만수 같은 사람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만든 이 세상은 “어쩔 수가 없”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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