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윤 장편소설
소설 <꽤 낙천적인 아이>는 자전적이다. 일본 소설에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때의 관습과 다른, 진짜 말 그대로 자전 소설이다. 작가는 이렇게 밝혀놓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명, 지명, 사건, 제품, 그 밖의 모든 고유명사는 어느 정도 실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삶에 관심이 많다. 무던히도 내 선택과 사고의 정체를 밝히려고 애를 써왔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으면서 공부 못했던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공부 잘하는 녀석들은 내가 문제 푸는 방식을 보고 이렇게 타박했다. “야, 이걸 왜 이렇게 풀어? 이렇게 풀면 간단한데.” 소설 속에서 작가는 자기 삶의 선택과 사고의 구조를 간단하게 풀어낸다. “깊이에의 강요”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고 선명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것일까?
이런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 속 고등학교 친구 윤지 이야기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율동부에서 활동하던 윤지는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 연거푸 되면서 “소윤지”라고 (작가의 성과 윤지의 이름을 붙여서) 불리며 인연을 쌓는다.
“나는 윤지가 율동부여서 좋았고 숨통을 트게 해 줘서 좋았다. 윤지는 내가 모범생이어서 좋아했고 숨통을 알맞게 조여줘 좋아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자랑이자 의지할 곳이었다.”
하지만 윤지는 자해하는 아이였고 늘 손목에 상처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이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또 만난다.
“윤지가 철없는 얘기를 하면 내가 타박했고 내가 아둔한 이야기를 하면 윤지가 한 수 가르쳤다.”
작가는 그녀와 만나고 들어와 좋다. 좋다. 흥겹게 혼자 술을 더 마시다가 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낭비다. 낭비. 이런 사치가 또 없어.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냐고. 토하고 있는 음식들이 아까웠다. 토가 멎자 눈물이 났다. 나는 윤지를 좋아하고 윤지와 함께하면 즐겁지만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윤지는 딱 보기에 더는 힘들어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면 이쯤에서 다 그만하고 싶었다.”
그리고 작가는 윤지를 멀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윤지가 찾아와 다시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작가는 생각한다.
“윤지와 함께 있으면 언젠가 내가 크게 다칠 거라고, 그것이 틀린 예감이었는지, 맞는 예감이었는지 나는 확인하지 않았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소설 속에서 내가 제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었다. 만일 이것이 정말 “소설”이라면 다른 전개나 고백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아버지, 어머니, 천주교 이야기, 학교 이야기 등등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소재들을 다룬다. 나는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대게 ‘너무 소소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만일 소설이라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소구하는 어떤 이야기라면, 좀 더 극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듯하다.
나는 작가가 고등학교 때 이미 페북을 했다고 해서 나와 굉장히 연차가 있다고 느끼다가, 오빠가 식당에서 키우던 개를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키우겠다면서 잡아 먹는 에피소드를 보고는 나랑 비슷한 연배인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앓은 다음이 아름다움의 어원”이라거나,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가 삼청교육대의 후신이고, 서울대의 폐수영장에서 민주화운동 하던 학생들이 많이 숨었다고 한다는 이야기 등은 내가 솔깃한 우리 시절의 에피소드들이었다. 하지만 나와 이런 에피소드를 소비하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대신 나라면 너무 소소하다고 생각해서 다루지 않았을 법한 가족의 일상이 이 소설에서는 소재로 많이 다루어졌다. 이렇게 한 것은 작가가 앞에서 밝혔듯이 “허구의 사건”이 아닌 “실재 사건”만 다루었기 때문일까?
작가는 복학생 선배와 첫 연애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저렇게나 많은데 나는 한 사람과 만났고 오래 이야기했고, 그럴 수 있어 기뻤다. 동시에 두려웠다. 살아가는 데에 특별히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 되려 했는데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길 것 같았다. 꼭 필요한 뭔가가 생긴 삶은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는 나 자신을 달래는 일에 지쳐 있었다. 일단 자자.”
그녀는 자신을 달래기 위해 무작정 운동장을 10,713 바퀴 달리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자 친구를 만나고는 “일단 자자.”라고 말한다. 이렇게 마침내 하나의 마침표가 찍혔다.
그리고 나는 조금 의아했다. “살아가는 데에 특별히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이 되려 했다.”라는 말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살았던 세계에서 자동반사적으로 연상되는 무위를 염원한다거나, 어떤 환멸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나와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의 완전히 다른 세계 인식이었다. 어쩌면 내가 윤지와의 결별을 이해하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까?
이 소설은 유년기를 다룬 다른 소설들. 예를 들어 아버지의 부재를 다룬 김애란의 <달려라 아비>나 그보다 훨씬 전, 은희경의 <새의 선물>에서 가족의 결핍을 다루는 것과도 확연히 달랐다. 그만큼 시대 차이가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꽤 낙천적인 아이>에는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가 인용되어 있었다. 나도 그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의 글은 늘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소설에서 작가는 엄마와 유람선을 타면서 윌리스의 글을 인용한다.
‘“절망은 내가 참으로 작고 약하고 이기적이고 의심의 여지 없이 언젠가는 죽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느끼게 되는 견디기 힘든 기분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서 죽고 싶은 것에 가깝다. 배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기분이다.”
나는 뛰어내리고 싶지 않았고, 견딜 수 없어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어떤 부분은 이해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조금 갸우뚱하기도 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를 언급하며 ”(1) 그가 언급한 슬픔과 절망을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 (2) 상대적 박탈감 느끼면서, (3) 그런 걸 느낄 수 있었던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위치를 질투하면서, 동시에 (4) 슬픔과 절망을 느꼈다고 고백한 어떤 사람을 내가 속 좁게 질투한 것에 대해 (5) 죄책감까지 느끼느라 완전히 소진되었을 텐데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라고 썼다.
지금 나는 이 감상문을 이렇게 길게 쓰고 있지만, 작가는 이렇게도 복잡한 삶의 태도와 생각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꽤 낙천적인 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나도 이렇게 써야겠다. 나는 사실 (5)까지 가지도 않는다. (1)도 어렵고 최대치로 봐도 (2)까지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인 “꽤나 열등생인 아이”이다.
그러니 <꽤 낙천적인 아이>는 이렇게 쉽게 읽히는데도, 여전히 나는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이렇게나 많다. 내가 이걸 소설로 읽어서 그런데 그렇다면 이 소설은 정말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소설”이란 것이 변했는데 그것을 내가 따라잡지 못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