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상하게도 비가 온 날 답지 않다.
공기는 이제 시원해졌고, 한기마저 느껴지지만 곧 오겠다 선언한 태풍 덕분인지
시원함과 비가 공존하고 있다.
여름의 시작에 찾아온 태풍 소식은 텁텁한 습도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어느새 계절은 바뀌어 청량하기 그지없다.
문득 거울은 본 지난밤, 차분한 머릿결에 마음의 소란이 함께 가라앉았다.
심각한 돼지털이자 반곱슬머리라 비가 오는 날이면 으레 껏 머리는 트위스트를 추었다.
날이 흐려서, 날이 좋지 않아서, 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머릿결은 그렇게도 춤을 춰댔다.
삼손은 아니지만 자신감의 8할의 헤어스타일이라 꼬불꼬불 곡선을 그리는 머리카락을 보면
자신감마저 똑 떨어지곤 했다.
열심히 헤어에센스를 발라 숨을 죽이고 빗질을 무수히 해댔었다.
그런 머리카락인데.
가을이 성큼 다가온 어젯밤은 그대로인 것을 보며 달의 삭망월이라고 느껴졌다. 29일을 주기로 변하는 달을 보며 환한 보름달을 기다리는데 새벽에 반짝하고 빛났다 보이지 않는 그믐달 같았다고나 할까.
더 이상 곱슬거리지 않는 머리카락을 보고 느낀 가을이었다.
여름이 시작될 때는 습한 장마로 그렇게나 울상을 짓게 하더니, 순식간에 변덕을 부린 날씨는 기분마저 변화를 준다. 드라이를 열심히 해대도 차분해지지 않는 머리칼을 보는 건 좀, 다소, 괴롭다.
헤어스타일이 주는 자신감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데.
게다가 이 헤어스타일은 각고의 노력 끝에 겨우 찾은 스타일이다.
얼굴형에 맞는 스타일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자고로 여자는 못생겨도 얼굴이 작아야 한다라는 지론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똑 단발을 했던 학창 시절은
그야말로 지옥의 완행열차 구간이었다.
절대로 허락되지 않는 다양한 헤어스타일.
미드에 나오는 중딩이들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은 시절.
자유가 합법적으로(?) 허락된 대학생이 되었지만, 지나친 착각과 어설픈 유행 따라 하기로 스트레이트 긴 머리 파마를 하며 나름 전지현을 꿈꿨는데(어차피 내 눈엔 내가 안 보이니), 절대로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은 아니었다. 유럽 여자 스타일이다, 모델 느낌 나는 얼굴이다 라며 스스로를 치켜세웠지만 국가를 불문하고 미의 기준은 거기서 거기더라.
긴 머리보다는 짧은 머리를 하기로 했다.
헤어숍에서 맨 처음 주문은 '지적이고 우아한 아나운서 스타일'.
원하는 헤어스타일 체크란에 이미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이대로 가야겠다 싶었고, 결국 얼추 비슷하게 되었다.
그 뒤로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머리카락은 절대 어깨선을 넘지 않는다.
누가 막아놓은 것도 아니지만 국경선인 양 넘지 않는다.
오히려 각을 돋보이게 하며 짧은 드라이 시간은 덤이요, 머리를 감는데도 얼마 걸리지 않는다.
가끔은 머리를 감고 올백을 하면 프랑스 여자 같기도 하다(라고 우겨본다.)
이젠 머리카락도 영양분을 좀 잡수셔야 탄력 있는 나이, 계절.
인생의 풍성한 가을은 아직이건만 계절과 절기는 이미 성큼 와있다.
드라이어의 따뜻한 바람을 느끼며 오늘도 곱슬머리를 진정시켜 본다.
아나운서 스타일 헤어면 승무원 스타일로도 가능할 듯.
마음의 비행기는 스스로 띄우고 하루를 살아가는 가을의 아침.
머리카락이 돌아온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