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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일러가 고장 난

by 마음돌봄

"여보, 보일러가 안되네."

"뭐? 그럼 따뜻한 물도 안 나오겠다. 그렇지?"

안다 박사 기계박사 남편이 들여다봐도 답이 안 나오는지라 지난 일요일밤 우리 가족은 물을 데워서 써야 했다.

버릴까 말까 고민했던 커다락 솥을 꺼냈다.

집에서 대단한 부엌살림을 하지 않는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말고는 행주 외에 무언가를 삻아본적이 없다.

어릴 땐 물을 데워서 뭔가를 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는데 요즘 아이들에게 상당히 희한한 경험인가 보다.

운동 후 반신욕을 기대했던 아들은 차가운 물만 나온다는 말에 얼굴빛이 좋지 않다. 추위를 타지 않는 녀석이면서 따듯한 물은 좋아하는 아이러니한 아이다. 미뤄뒀던 온수매트를 침대마다 깔고 두툼한 수면 양말을 꺼내 신었다. 슬리퍼야 말해 뭐 하겠는가 나에겐 반려 물건인 것을.


"군대 가면 찬물에도 씻고, 2분 안에도 씻고 해야 하니까 이 정도쯤이야."


남편의 이 말을 뒤로하고 난 물을 데웠다.

아이들이 크건 어리건 엄마의 본능이다. 무조건 많이 음식을 준비하고 추우면 온수매트부터 생각하고

따뜻한 물을 준비하는 게 아이들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순전히 내 기준으로 모든 걸 준비해 준다. 귀차니즘이 심한 엄마이니 딱 할 수 있는 만큼만.


오랜만에 물을 데우고 있으려니 어릴 적 생각도 나고 꼬마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에겐 많이 없는 경험이리라.

언제나 어디서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세상이니.

물을 통에 담아놓으니 그럭저럭 두 명분의 양은 된다.

아이들에게 절반씩 쓰라고 했다.

부족한 듯 넘치지 않게, 모자란 듯 충분하게.

마지막에 찬물로 한 번 헹구고 나왔다고 말하는 둘째는 머리가 시원하다고 했다.

이렇게 물을 담아서 써보니 조르바의 말이 맞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사람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많이 없다고 했는데 많은 양의 물을 흘려보내지 않아도

충분히 내 한 몸은 깨끗하게 할 수 있다.

아침엔 지난 저녁보다 물양을 더 적게 해서 데웠다. 이 정도 양이면 머리를 감는 데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 캠핑에서도 6분이란 시간이면 샤워와 모든 것이 충분하지 않았던가.


겨울이 깊어가는 지금 보일러의 작동 여부는 너무나 소중하다.

그럼에도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이런 순간조차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걸 깨달았어요 라는 교훈적인 얘기가 아니다.

하루하루 속 평범한 경험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도 하고 이렇게 글감도 제공하지 않던가.

그나저나 곧 오신다던 보일러 서비스 기사님은 언제 오시는 걸까.

따듯한 차라도 한 잔 준비해 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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