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인간의 조건』 (한승태, 시대의창)
“씨발, 너나 처마셔라. 주문한 지가 언젠데.”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스무 살이었고,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주문이 밀려 음료 서빙이 좀 늦었는데, 뒤늦게 음료를 서빙하며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 내게 중년의 남자가 소리질렀다. 그 옆에서, 아마도 아들인 것 같은 꼬마 남자애가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예전에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연예인이나 사회 저명인사들이 나와 다양한 노동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해서 일당을 받고 그 돈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물론 방송이고 유명인들의 하루 체험이니까 그랬겠지만, 일 자체는 고되어 보여도 일터의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고 하루 일당도 꽤 괜찮아 보였다. 그렇게 유쾌하고 좋은 분위기에서 일을 하고 대가를 정당하게 지급받는다면 육체적으로 힘들어도 견딜만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회 초년 시절 내가 겪은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이십 대 초반에 나는 최저시급도 받지 못하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당연한 듯 고용주로부터 착취당했다. 가끔은 선을 넘는 손님의 하대나 욕설에도 고개를 숙이고 사과해야 했다. 방송은 그런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름답지 못하니까. 그런 장면들은, 육체노동의 가치를 보여주고 땀 흘려 번 돈으로 이웃에게 기부하겠다는 프로그램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으니까.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은 저자가 20대 때 전국 각지를 떠돌며 꽃게잡이 배, 편의점, 주유소, 양돈장, 비닐하우스 농장, 자동차 부품 공장 등에서 일한 경험을 기록한 르포 형식의 글이다.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일했던 곳의 열악한 현실들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들 말이다.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는 인간이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노동을 기반으로 우리는 채소와 해산물과 고기를 먹고, 생활용품을 사서 쓰고,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만, 정작 그 현장을 살아내는 이들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을 정확하게 보고 싶다. 설령 마음이 괴롭고 불편하더라도 진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제대로 말이다.
* 2022년 7월 부산 연제구청 소식지에 수록했던 글을 일부 수정하여 게재합니다.
책 속에서
- 밑바닥까지 떨어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었고 나는 그 밑바닥에 있었다. 내가 신경 쓸 일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83p)
- 체스의 졸은 한 번에 한 칸씩 전진하는 것밖에 못하는 절름발이 말이지만, 그런 졸이라 해도 상대편 진영 끝에 도달하게 되면 여왕으로도 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남의 돈을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선 졸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평생 졸에 머무르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나는 조금 두려워진다. (447p)